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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이산각연구소장)
   문화 민족임을 상징함에 있어 서로의 뜻을 손쉽게 전파하고 남길 수 있는 것으로 문자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독창적이고 우수한 한글을 창제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훈민정음 본문, 훈민정음 해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많은 한글 판본을 통해 한글을 널리 알리고 사용하게 할 수 있게 한 목판 인쇄 문화는 가히 선구적이고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의 목판 인쇄 문화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소중한 열쇠이며, 과거에서 미래로의 끊임없는 대화, 지역과 나라를 초월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목판 인쇄가 단순히 종이에 찍어내는 아름다움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은 지식 정보를 폭넓게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문화유산 판각 및 복원 사업’의 그 첫 번째로 진행 중인 최초의 한글 문헌 ‘용비어천가’ 목판 복각 사업은 광해본을 모본으로 삼아 전체 10권(125장)을 복각하는 것이며, 2006년 하반기부터 2007년도까지 제1권의 내용 전체를 복각하여 목판 인쇄 책으로 완성될 예정입니다. 제1권은 목판 수가 총 32장(64판, 양면 복각)으로 서(序), 전(箋), 1~9장까지의 내용이며 책 쪽수로는 130쪽 정도의 분량이 됩니다. 목판 문화유산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크게 치목-새김 과정-목판 인쇄-제본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목판 제작에서 새김과 목판 인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무를 다스리는’ 치목 과정입니다. 목판 인쇄 품질과 목판의 수명이 이 단계에서 결정됩니다. 용비어천가는 일반 목판보다는 세로 길이가 길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목재를 구함에 있어 어려움이 많았는데, 사용 목재는 산벚나무로 나무의 특성상 갈라짐과 휨 현상을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고려 팔만대장경의 경판 목재 63% 이상이 산벚나무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새김과 목판 인쇄에 적합한 목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재를 소금물에 삶는 방법과 자연 건조하는 방법을 병행하여 목재를 다스렸으며 판목(板木)의 손잡이(마구리) 부분에 촉수를 3개 넣어 뒤틀림 현상을 최소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용 목재 선정과 조판(組版)까지도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판하본(版下本)을 붙여 새김(刻) 과정에 들어가는데, 목판의 전체 크기는 가로 55cm, 세로 29cm, 그중에서도 글자가 새겨지는 면은 가로 37cm, 세로 26cm 내외, 16~18행으로 목판 한 면에 새겨지는 글자 수는 서(序)부분과 전(箋)부분은 130~190자 내외이지만, 1장(章)부터는 한 면에 새겨지는 글자 수가 400~680자 내외입니다. 원문 다음에 한역시(漢譯詩)와 언해(諺解)를 달았는데 1cm 미만의 작은 한자로 되어 있으며 한 판에 한 글자만 어긋나도 목판 전체가 못쓰게 되므로 새김 과정은 한 획 한 획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하는 섬세한 작업입니다. 하루에 10시간 정도 새김 작업에 임하고 있지만, 마음의 흐트러짐이 있을 때는 한 행도 새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목판 새김은 인쇄물로 그 품질을 평가받는데, 한지와 먹이 만나 살아있는 활자가 만들어질 때가 가장 벅찬 순간이기도 합니다. 한지는 100% 닥나무로 제작된 전주한지를 선정하였습니다. 목판에다 먹을 칠하고 마력으로 문질러 찍어내는데 목판 인쇄의 핵심은 글자가 뚜렷하고 먹의 농도가 일정한 것으로, 조금만 흐트러져도 글자의 먹 농도가 일정치 않아 파지가 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쇄 문화는 한지와 먹, 나무 각 재료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 서양 기법보다 간편하고 간결하며, 대중의 참여가 아주 쉽고 많은 양을 인쇄할 수 있으며 오래도록 보존하기에 손색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2007년 9월에 영국 대영박물관과 템스(Thames) 페스티벌에서 한국의 목판 인쇄 문화를 알리는 전시ㆍ체험전을 진행하였는데, 활자 인쇄에만 익숙해 있는 많은 유럽인들은 목판 인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습니다. 훈민정음, 고지도, 민화, 창작 목판화 등을 직접 인쇄해보며 우리 목판 인쇄 문화의 장점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먼저 목판 인쇄된 한지를 접고 포개어 초벌 맨 다음 네 가장자리의 튀어나온 부분을 자릅니다. 표지를 덮은 후 다섯 군데 구멍을 뚫어 면사로 묶으면(오침안정법) 하나의 새 책이 탄생하는데 양 모서리에는 한지로 배접한 조각을 대어 시각적 효과도 높이고 마모를 방지합니다. 제본에서 한 장을 빠트리거나 순서가 뒤바뀌면 전체가 엉망이 되기 때문이며,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일을 마쳐야 합니다.

   출판문화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새 책의 출간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겠지만, 책을 만들기도, 보기도 힘들었던 옛날에는 책에 대한 자세가 달랐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소장하기도 힘들었지만 보물 이상으로 애지중지하여 후손에게 남겨주었기에 오늘날 우리들 곁에서 그 가치를 유감없이 빛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목판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전해 주려 했던 지식 정보의 보고 인쇄술은 선조들이 남긴 최고의 정신문화로 세계적인 기록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 소중함과 우수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글 목판 문화유산 판각 및 복원 사업으로 전개되고 있는 최초의 한글 문헌 ‘용비어천가’의 복원은, 현대 인쇄술이 가져다준 대량 인쇄 문화와 전자 매체를 통해 정보 전달의 편의성에 너무 익숙해진 오늘날의 우리에게 조상들이 한 글자 한 글자 나무 위에 새겨 전해준 지식 정보의 정신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한글을 창제하여 전파한 인쇄 문화에 대한 연구와 함께 목판 인쇄 문화의 계승 작업이 자랑스런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보다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