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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짝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을을 날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멫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꼬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 앉어서
지난 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산곡(山谷)」,『朝光』 3권 10호, 1937. 10.


   백석(白石, 1912-1995)의 시 「산곡(山谷)」은 그가 1937년에 쓴 ‘함주시초(咸州詩抄)’ 중의 한 작품이다. 함주는 함경남도 함주군에 있는 지명을 가리킨다. 시인은 조용한 말투로 추운 함경남도 함주 땅에서 겨울을 날 집을 구하려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겨울을 날 집을 구한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무척 매력적인 일로 느껴진다. 흔히 뱀이나 곰이나 두꺼비 같은 동물들이 봄, 여름, 가을에 활동하다가 겨울에는 동굴이나 습지에 숨어서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사람도 겨울잠을 자러 산골짜기로 들어간다는 사실은 자연에 순응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이들 곰이나 뱀같은 동물을 ‘달동물’이라고 부른다. 달이 보름에는 나타났다가 그믐에 사라지는 것처럼 이들도 겨울에는 잠자다가 봄에 나타나서 붙인 명칭이다. 이 시를 보면 시인도 이런 달동물적 속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시인이 겨울잠을 자려고 고른 장소는 바람도 잔잔한 볕바른 골짜기이다. 돌각담에 머루송이가 까맣게 익고 자갈밭에는 아주까리알이 익어서 쏟아지는 가을날 시인은 집을 구하러 나섰다. 이 골안의 집은 몇 집 되지도 않는데 모두 터앝(집의 울 안에 있는 작은 밭)에 김장감을 늘어놓았고 뜨락에는 잡곡 낟가리가 쌓여서 빌 듯한 집은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가 다한 산대(산대배기, ‘산꼭대기’의 경북 방언) 밑에 빌 듯한 돌능와집(돌너와집: 기와처럼 앏은 돌조각으로 지붕을 올린 집)이 한 채 있음을 발견한다. 그 집 안 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 놓고 시내 거리로 내려간다고 한다. 이제 시인은 겨울을 날 집을 찾는 목적을 달성한 듯 보인다.
   시인이 겨울을 날 공간을 찾는 목적은 무엇일까? 자세한 사정은 나타나지 않지만 빌릴 집에 놓여 있는 스무 개가 넘는 벌통의 꿀벌들을 보면서 이 벌들이 지난여름 트럭을 타고 장진 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표현에서 어느 정도 암시된다. 즉 이 꿀벌들이 꿀을 모으느라고 여름철에 트럭을 타고 장진 땅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여름 동안 생계를 위해서 꿀벌처럼 노동하고 고생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꿀벌들처럼 쉬고 싶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여름 동안 고생하다가 온 꿀벌들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쑥국화꽃이 시들기를 바라는 시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쑥국화꽃이 핀 이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움푹 파인 공간이다. 그만큼 골짜기는 아늑하고 햇볕이 따사로운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겨울의 골짜기 이미지는 여자의 자궁 이미지와도 통한다. 기가 응축된 곳이자 근원적인 삶의 자리인 자궁의 이미지는 신령스러운 힘의 저장처일 수 있다. 시인은 함경도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날 방도를 찾아 이 자궁의 이미지를 지닌 골짜기까지 들어온 것이다. 자궁은 신령스러운 힘의 저장처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아기를 내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자궁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골짜기는 시인에게 휴식을 주고 겨울잠(동면)을 자게 하며 힘든 노동으로부터 숨을 고르고 힘을 기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자궁으로의 귀환은 태아 시절로의 퇴행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골짜기로 와서 겨울나기를 꿈꾸는 시인의 모습에서도 현실 도피적인 흔적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긴 동면의 시간 속에서 다시 힘을 길러 달동물처럼, 초생달처럼 찾아올 봄의 재생과 부활을 꿈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