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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내 이름은 ‘김진해’이다. 난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 자기 이름에 핸디캡을 느끼는 사람이 꽤 많은데, 나도 거기에 속한다. 어려서부터 내 고정 별명은 ‘왕지네’였다. ‘벌레’라고도 불렸다. 나이 들어서는 전화로 내 이름을 상대방에게 알려줘야 할 경우가 있는데, 남자들이 끝 자로 ‘해’를 잘 안 써서 그런지 나중에 확인해 보면 ‘김진회, 김진혜’로 적힌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젠 전화로 이름을 일러줄 때 “‘둥근 해가 떴습니다’할 때 ‘해’입니다”라거나 “‘바다 해’입니다”라는 사족을 일일이 달아준다. 어감 또한 유약하여 아무리 강하게 발음을 해도 이른바 ‘남자다운’ 기풍이 묻어나지 않는다. 이름 때문에 그런지 성격도 흐리멍덩하다. 어릴 때 집에 돌아다니던 성명풀이 책은 한자 획수로 내 운명을 점쳐 주었다. 그리 평탄하지도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도 말년 운이 좋지도 못할 팔자라는 풀이를 보고는 어린 나이에도 골방에 배를 깔고 긴 한숨을 지었다. 학기 초 수강신청 기간에는 내 이름만 보고 여선생인 줄 알고 수강했다가 시커먼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 실망하여 수강 정정하러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학생들도 심심찮게 본다. 그래서 난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도 평생을 붙어다니는 거라 그런지 이름이 빽빽이 나열된 종이에서도 자기 이름만큼은 쉽게 찾는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이름 주변에는 약간의 ‘광채’가 띠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름은 그렇게 거역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다. 이름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한다.
   ‘피나요, 임신중, 배도둑, 주기자’에서 ‘강남제비, 어영부영’으로 이어지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놀림을 당하며 살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 이름은 본인은 물론이고 ‘이름 갖고 장난친’ 부모까지도 도마에 오른다. 이름에 대해 ‘비정상적’이라는 판단이 들 때, 혹은 발음이 다른 무엇과 닮아 있을 때, 그 이름은 곧바로 그 다른 무엇으로 쉽고 정상적인 미끄럼을 타며 과도한 주목과 날카로운 놀림의 표적이 된다.
   사람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신화 속에서 산다. 신화를 벗어난 인간은 존재한 적이 없다. 특히 말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술적’ 마력에서 자유롭게 풀려나지 않았다. 언어학 책에서 싸늘하게 말하고 있듯, 사물에 대한 이름은 그저 자의적인 약속에 따라 붙여지지 않는다. 이름은 현실 속에서 묘한 영물로 위력을 떨친다. 인터넷으로 탈바꿈한 작명 사이트가 여전히 성업 중이며, 새해에는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사주풀이’나 ‘올해의 운세’를 본다. 거기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키워드가 ‘이름’ 아니던가. 한국에서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걸로 치면 TOEFL이나 TOEIC 점수가 훨씬 더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텐데도 여기서는 보기 좋게 무용지물이 된다. 아직까지도 아이를 낳으면 오행(五行)과 수리(數理)에 맞추어 이름을 짓는다. 선천적인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후천적인이름은 운명을 길하게 바꾸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싸맨 채 상극(相剋)을 피하고 상생(相生)을 취하여 만든 이름으로 아이는 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릴 운명을 획득한다. 아직 이름이 없는 아이는 불운도 행운도 박복도 다복도 결정이 미뤄진 채로 있다.
   신화가 힘을 갖는 것은 그것이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구성하고 변경하기까지 하는 구속력을 갖고 있기(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을 길흉으로 나눈다면 잘되거나 잘 안되거나 둘 중 하나인 50%의 가능성으로 사는 것이므로 신화의 힘을 증명할 길이 없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름은 더욱 신화가 되고 그 신화는 말을 통해 강화된다. 말이라는 추상적 존재는 추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의 물리적 힘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서는 자신이 짓지 못했지만 평생 붙이고 다녀야 하는 이름 때문에 골몰한다. 스스로 자신을 호명할 권한을 갖기 위해 개명을 하기도 하고 필명을 짓기도 예명을 짓기도 한다.
   말이나 문자를 신화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잘 바뀌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면 어른들께 혼이 난다. 붉은색은 죽은 사람한테나 쓰는 것이라고. 연락 없이 귀가가 늦는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라고 말하면 ‘입방정’ 떨지 말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그래서 정녕 ‘말’이 물질인 ‘씨’로 대치될 수 있다는, 그렇기 때문에 그놈의 ‘입방정’ 때문에 어떤 결과의 원인이 된다고 믿게 만든다. 입방정 때문에 사람이 다치고 시험에 떨어진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귀신도 모른다’고 해서일까, 아니면 말이 목소리로 외현(外現)되어야만 주술적인 힘이 작동한다는 신화적 믿음 때문일까 많은 종교인들은 말로 기원을 해야, 그것도 큰소리로 울부짖어야 그 기원이 하늘에 ‘상달’되고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신은 침묵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또한 ‘저주의 언사’가 인생을 망치게 하고 불행을 몰고 올 것 같아 두렵다. 과학적 합리주의 정신으로 보면 존재가 앞서고 말은 뒤따를 것 같은데, 사람들은 말이 존재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신화의 지배력은 그것이 비록 아흔아홉 번 틀리더라도, 딱 한 번만 맞아떨어지면 상실되지 않는다. 신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며 현실 지배력을 갖는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적중률이 평균치에 턱없이 모자라도 그 한두 번의 우연한 일치, ‘씨’가 되어 버린 말 때문에 우리는 말을 두려운 존재로 인식한다.
   이름은 나 아닌 타인(부모)의 욕망이 반영되기도 하고 스스로 욕망을 생성하기도 하는 최면과 같은 것이다. 우리도 어느 순간 자식들에게 이름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름처럼 살라고 하지 않겠는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정리된 삶의 결과물은 없다. 오직 이제부터 굴려야 할 삶의 여정만이 있다. 거기에 부모의 목표, 꿈, 바람이 응축된 이름이 붙어져야 ‘사람’이 된다. 욕망이 출발을 강제하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무한 역설의 상태, 그게 이름짓기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아니겠는가. 내 두 아이의 이름의 뜻은 ‘차향처럼 어질게’와 ‘맑은 물처럼’이다. 이제 여덟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 아이에게 이름에 붙여놓은 나의 욕망을 수십 번은 말했었다. 이 ‘반복학습’의 효과는 무의식적인 행로에 이래저래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든 이름은 명명의 순간부터 대상에 대해 신화적 힘을 갖는다. 그것은 호명될 때마다 차곡차곡 쌓여 인생의 진로에 각인된다. 꿈의 현실화가 아예 없는 일이 아니듯, 이름에 부여된 욕망이 현실화되는 일은 없다 잘라 말하기 어렵다. 반대로 이름으로 놀림 받고 이름 그 자체만으로 상처를 받는 일 또한 이름이 부정적으로 현실화되는 일이므로. 그래서 이름은 역사가 되고 과제가 되고 유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