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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윤경(광주 화정초등학교)
   ‘000? 이 지역번호는 어디지?’ 낯선 지역번호라 잘못 걸렸겠지 싶은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소솜 선생님, 저 홍농초등학교를 졸업한 종현이에요.”, “어, 그래?” 하며 인사를 했지만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집인지라 후다닥 책장에서 졸업앨범을 펼쳐들고서야 종현이와 나의 또 다른 이름 소솜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에 종현이는 “저 기억 못하시겠어요?”하고 묻는다. 태연하게 “알지 1번 최종현”이라고 말해주니 녀석은 번호까지 기억하시냐며 무척 감동을 받은 눈치이다.
   내가 2002년을 함께 보낸 아이들, 그 아이들이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눈망울로 늘 조용한 아이였던 종현이는 놀랍게도 검정고시를 통해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가 남다른 생활을 하면서 겪었을 숱한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찡해왔다. 종현이는 기억 속의 6학년 때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목소리로, 지금 천안에 있는 자동차 관련 대학을 다니고 있고 독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후년 광복절에 모이기로 한 친구들과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겠다며 그 전에 한 번 광주에 와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난 “잘했다”라는 말만 연거푸 했고 또 연락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에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2002년…….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열기를 떠올리겠지만 그보다 더 날 가슴 벅차게 하는 건 그해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나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6학년 담임을 자청했고 다행히 우리 반 아이들과 나는 마음이 참 잘 맞아 별나게 많이 울고 웃으며 한 해를 보냈다. 그 해 졸업을 앞두고 학급 문집을 만들면서 1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뽑았는데 수학여행, 우리 반 학예회, 개미장터 등등 많은 일들이 후보에 올랐지만 아이들은 1위로 단연 ‘한글날 맞이 행사’를 뽑았다.
   6학년 10월은 못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느라 아이들도 나도 유독 정신없이 바쁘다. 그렇지만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놓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안타까왔다. 그래서 우리 반은 그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한글날 맞이 행사를 자체적으로 갖기로 했다.
   첫 번째 행사는 ‘순우리말 이름 짓기’.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맞는 이름을 순우리말로 지어보기로 했다. 먼저 간단한 설명을 해 주고 며칠간의 시간을 주었다. ‘아이들이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대충 해오면 어쩌지?’하는 걱정들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보늬, 운김, 그린나래, 마리, 벼리, 다솜, 느루……. 들어보지도 못한 예쁜 이름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발표하는데 역시 아이들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때 나도 소나기가 한 번 지나는 동안이라는 뜻의 ‘소솜’이라는 한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했던 아름답고 따뜻한 우리들만의 한글 이름……. 우리는 이 이름으로 이름표를 만들어 달고 한 달간 불러주기로 했는데 평소에 친하지 않았던 아이들끼리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지내니 기분 좋은 소란함이 한 달간이나 계속되었다.
   두 번째 행사는 ‘외래어 외국어 안 쓰며 한 주 보내기’였는데 이것은 무조건 외래어와 외국어는 우리말로 바꾸어 쓰고 말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외래어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데 머리를 서로 맞댔고 불편하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반에서 한창 유행하던 ‘배드민턴’이다. 하루는 희정이란 아이가 “선생님!”하고 불러놓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깃털 달린 공놀이 하러 가도 돼요?”해서 한참을 웃었는데 아이들도 나도 그 이름이 참 좋아 그 뒤로도 우리 반 아이들은 배드민턴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한 주를 보내고 아이들도 나도 우리말에 쓸데없는 외래어와 외국어가 너무 많다는 것에 공감하였다. 그래서 아예 교실 뒤에 게시판을 만들어 외래어 바꾸기를 했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들의 재밌는 ‘말 바꾸기’는 계속 되었다. 한글날 당일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나 원리에 관해 공부하고 한글 사랑의 다짐도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불러보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순우리말 이름은 가끔 불려졌고 외래어 외국어도 다시 쓰게 되었지만 훗날 우리 아이들이 이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 짓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마음을 다잡겠지 하는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종현이의 전화를 받고 내가 그 해에 우리가 나누었던 한글 이름을 하나씩 둘씩 떠올려보면서 새삼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짐을 느끼듯이 말이다.
   올해 나는 오밀조밀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까만 콩 같은 3학년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다. 4월에는 담양에 있는 가사문학관으로 체험학습을 다녀왔는데 아이들은 가사를 적어놓은 전시물에는 관심이 없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선생님, 언제 나가요?”, “밥은 언제 먹어요?”를 외쳐댔다. 그 중 호기심 많은 녀석 하나가 “선생님, 송강 정철은 송강이 이름인가요, 정철이 이름인가요?”하고 물었다. “응 그건 둘 다 이름이야.”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자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금새 내 주위를 둘러싼다.
   “원래 이름은 정철이시고 송강은 호라는 거야. 호는 그냥 별명이라고 생각하면 돼. 호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들이 지어주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짓기도 한단다. 선생님도 호가 있어.”
   “우와! 정말이요? 뭔데요?”
   “응 소솜이야. 소나기가 한번 지나가는 동안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데, 선생님은 소나기처럼 너희들과 짧게 만나지만 무더운 날 소나기가 내린 그 시원한 느낌은 오래 남듯이 너희들 마음속에 오래오래 기억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아이들은 뭔가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콩깍지에서 튀어나온 콩알들처럼 체험학습장 여기저기를 데굴데굴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녀석들도 분명 예쁜 우리말 이름이 갖고 싶을 것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오늘도 “사랑하는 소솜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교실을 나선다. 올해에는 한글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순우리말 이름 짓기를 할 참이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가 고운 말과 아름다운 이름 가득한 한글날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먼 훗날에도 우리들이 나누었던 고운 말과 아름다운 이름을 떠올리며 마음 한 켠이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