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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단어는 홀로 있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다시 말해,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무(無)이자 가능태일 뿐이다. 단어는 문장이나 맥락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미를 확정한다. 홀로 있는 단어는 그저 씨앗이고 질료일 뿐이다. 맥락은 의미를 낳는 어머니이자 출발점이다. 맥락 없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 있는 단어를 정의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정의한다고 해도 그것은 맥락의 빛에 비친 그림자를 더듬는 것이다. 맥락에서 떼어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맥락 없는 정의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맥락은 무궁무진하다. 맥락은 계속 달라진다. 그래서 의미는 과거형이자 현재형이다. 이 자명한 현실 때문에 의미는 응고되지 않는다.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는 언어의 특성 때문에 의미 생성의 현장성을 의식하지 못하다가, 전혀 새로운 맥락에 적용될 때에 불쑥 감지하게 되지만 말이다. 의미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새로운 우주 탄생의 현장, 새 생명의 분만 현장을 우연히 보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미 생성의 현장 몇 가지를 본다.

   영화 <밀양>을 만든 이창동 감독은 영화의 공간인 ‘밀양’에서 포착한 특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특징 없음이 특징이다. 밀양은 너무 전형적이다. 밀양은 정말 뭘 두드러지게 내세울만한 특징이 없다. 아주 전형적인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는 도시다. 밀양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감독은 ‘Miryang’이라고 하면 그만일 ‘밀양(密陽)’을 ‘Secret Sunshine’이라는 이름으로 재정의한다. 감독의 반어법처럼 너무 전형적이라 당연하고 그래서 무감각하던 대상에 씌운 이 새로운 해석은 ‘은밀한 빛’이었다. 이를 통해 그저 하나의 ‘특징 없는’ 기표로 무심하게 지나쳤을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담았다. ‘진로(眞露)’가 ‘참이슬’로 재해석되는 순간 새로운 의미가 톡 튀어 오르듯이, 실제 내용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른 사물, 다른 이미지, 다른 의미로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늦은 전철을 탔다. 귀가 시간이라 사람들로 가득하다. 책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된 공간에는 못 다한 대화와 술안주 냄새가 거나하게 묻어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 노약자석 부근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어떤 할아버지의 고함소리.
   “노약자석이 왜 있는지 알아? 노약자석이 뭔지 아냐고?”
   일순간 잡담으로 번잡스러웠던 차 안이 조용해졌다. 누구인지 보이지 않아 마치 구내 방송하듯 쩌렁쩌렁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모두 다 아는 단어이지만 그 뜻을 물을 때에는 누구든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노약자석이 뭐지?’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술 냄새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노약자석은 그 앞에서 전화를 받지 말라고 있는 것이야, 알겠어?”
   어떤 여학생이 노약자석 부근에 서서 핸드폰을 받았나 보다. 할아버지는 그게 귀에(혹은 눈에) 거슬렸나 보다. 그리고는 노약자석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림으로 여학생을 ‘제압’했다. 여학생은 아무 대꾸가 없다. 대신 그의 수호천사(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괜히 강해진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선다.
   “앉지도 않았는데, 왜 그러세요?”
   후후, 젊은이의 정당한 이 발언은 불쏘시개가 되어 할아버지의 입을 걸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대고 젊은이는 다시 논점 일탈의 도전을 했다.
   “그러니 노인들이 대접을 못 받는 거죠! 나이를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죠!”
   이 말 때문에 우리는 할아버지한테서 약간의 거칠지만 정겨운(정겹지만 거친?) 욕과 함께 예의 노약자석 정의를 반복 청취해야만 했다. 노약자석에서는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말라. 왜냐? 노약자석은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말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이므로.
   나는 그분의 뛰어오를 듯 귀여운 정의가 너무 재미있어 내내 웃으며 왔다. 전철을 내려서는 그 멋진 할아버지 얼굴이 보고 싶어 ‘전화를 해서는 안 되는’ 노약자석으로 걸어가 보았다. 그러고는 할아버지께 씽끗 웃음을 선물하고, 차 안에 남아 있는 다른 이들에게 그 즐거운 귀가가 지속되어서 부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어느 해 겨울 아침에 딸 다인이는 엄마한테 크게 혼이 났다. 일어나자마자 아빠를 꼬드겨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 영화 ‘팬다와 친구들’을 보았다. 아침밥을 달라 하지도 않고, 아빠의 늦은 귀가에 화난 엄마가 일부러 안 일어난 아주 절묘한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아이를 달래주러 같이 가게에 갔다가 오는 길에 몇 마디 말을 건넨다.
   아빠 : 다인아, 다인이는 올 성탄절에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냐?
   다인 : (자신만만하게) 네, 아빠!
   아빠 : 근데 아침에 밥 달라고도 안 하고 비디오만 봐서 엄마한테 혼났잖아. 그런데도 할아버지께서 선물을 주실까?
   다인 : 용서받으면 괜찮아요.
   아빠 : 그래? 엄마한테 용서받았어?
   다인 : 그럼요! 아빠, 용서가 뭔지 아세요? 모르시죠? 알려드릴까요?
   아빠 : (흠찔) 응? 그래, 용서가 뭐야?
   다인 : 용서란, 잘못을 했을 때 …,
   아빠 : (아이가 무슨 말을 할까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다인 : 엄마한테 콕 안기면, 엄마가 안아주면 그게 용서예요. 아빠, 이제 아시겠죠?
   용서란 안겼을 때 안아주는 것이다. 잘못했을 때 온몸으로 안겨야 용서받을 수 있다. 아까 그렇게 혼쭐이 나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그 온몸으로 안긴 것 때문이다. 용서받았으므로 이전보다 더 자신감이 넘친다.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도 찜찜해하는 어른과는 다르다. 잘못을 범하고도 피해자에게 무릎 꿇고 안기지 못하는 어른들과 다르다. 엄마가 안아주었으므로 모든 걸 남김없이 용서받은 것이다. 그걸로 끝이다. 깔끔한 마무리이다.

   어차피 세상살이는 자기가 정의한 대로 정의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만의 정의를 무수히 하며 산다. 너란 놈은, 인생이란, 나무란, 회사란, 엄마란, 밥이란, 술이란, 친구란, 아 그리고 신이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언어로 표상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머리는 나름대로의 정의로 세계를 구획한다. 그 구획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동일하지 않다. 같다고 상상할 뿐, 다 다르다. 내 정의가 타인의 정의와 동일하다고 상상하며, 내 정의가 타인에게 관철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를 정의한다.
   정의한 대로 세상이 움직이거나 정렬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정의한 대로만 된다면 이 세상은 훨씬 정의로울 것이다. 언어 밖의 세계는 언어에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운 좋은 일이다. 약간의 억지가 있더라도, 그 억지를 용납할 수 있는 경쾌함이 우리에게 있다면, 진부함을 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이들과 한 하늘 밑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로 흥겨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