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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경(여수중앙여자중학교)
   ‘여럿이 함께’
   우리 반 급훈이다. 2초 만에 후다닥 내 맘대로 정해버린 급훈이다. 하늘색 한지 테두리에 궁서체로 깔끔하게 인쇄되어 액자에 위압적으로 걸려 있다.
   그 급훈 아래 우리 반 녀석들은 오늘도 어제처럼 죽어라 떠들어 댄다. 아무리 “조용히 해라”, “입 다물어”, “누가 돌아다니니?”, “제자리에 앉아” 등등을 외쳐대도 그때뿐, 도무지 ‘정숙’이라는 낱말조차 배우지 않고 중학교에 올라온 듯 시끌벅적한 아침 자율학습 시간이다.
   하기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많은 말들을 하고 싶겠는가? 그 근질거리는 입들을 단속시키는 게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지난밤 연속극이 어쩌고, 동방신기의 시아준수가 어떻고, 영웅재중은 어떻고 등등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재잘, 와글와글, 시끌시끌……. 담임이 교실로 들어오는지도 모른 채 짝꿍과의 수다에 열을 올려댄다.
   솟구쳐 뿜어 나오는 그 뜨거운 열정과 열의를 수업시간에 조금이라도 나누었으면 사랑과 예쁨을 듬뿍 받는 특별한 제자라도 되었을 텐데… 요녀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표시간이 되면 입을 다문다. 그것도 앙다문다.
   그러고 보니 요 녀석들과의 만남이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입학식 때 학교 운동장에서 담임 소개를 받고 처음 보았을 때 맨 앞줄 어느 녀석이 “선생님! 너무 예뻐요. 선생님 반이에~요.”라며 씩씩하게 V자를 그리며 외쳐댄다. 그 씩씩함과 생기발랄함이 너무 좋아 학급 임원 선출시 내 맘대로 체육부장을 시켰다. 담임의 권위를 너무 남발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반 체육부장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 여전히 씩씩하고 건강하다.
   아침부터 목청껏 외친 덕에 1교시 수업 전에 이미 나의 목은 칼칼해지고 공연히 미운 맘이 들어 한 번 더 협박을 한다. “낼부터 떠들면 죽~어!” 곱지 않게 눈을 흘긴 후 교실 문을 나선다.
   문을 닫자마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고얀 녀석들.

   아이들과의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삼월 어느 날, 인상이 밝고 착실해 보이는 은희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아빠의 직업을 묻게 되었다. “아빠는 뭐하시니?”, “아파서 입원 치료 중이세요.”, “애고, 엄마가 힘드시겠구나”라고 했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아주 어렸을 적 아빠와 이혼한 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노라며 이미 가늘어져 버린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을 한다. "우리 은희, 한 번 안아 보자"며 움츠러질 대로 움츠러진 여리고 작은 어깨를 꼬옥 보듬었다. 그 아이의 아픔과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짠해진다.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할 텐데… 혼자서 모든 일을 헤쳐 나가기엔 역부족일 텐데…’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워 눈물이 그렁한 나를 오히려 위로한다.
   “선생님. 그래도 저, 밥 잘해요.”
   그날 아침 꼬옥꼬옥 은희를 보듬어 안아 주는 날 보아선지 우리 반 녀석들은 상담 때마다 안아 달라며 떼를 쓴다. 중 1학년답다. 알밤을 콕하고 준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한 번은 학기 초부터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지각대장 은영과 상담할 때였다.
   담임인 내가 모르는 무슨 가정적인 문제가 있어 날마다 지각을 하는 건 아닌지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묻는다. “엄마는 뭐하시니?”, “엄마요, 집에 계시는데요.”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다. “그럼 오늘은 왜 또 지각했어?”, “늦잠 잤어요.” 그 말과 동시에 "꿇어 앉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벌을 받고 야단을 맞아도 우리 은영인 무수히 많은 핑곗거리를 들고 오늘도 꿋꿋하게 지각을 한다.
   학기 초 2학년 언니들께 충성서약을 해 날 혼비백산하게 한 예은, 한 표 차이로 당당하게 실장에 당선된 보라, 우리 반 1등으로 들어와 공부뿐 아니라 다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는 야무진 희경, 담임인 날 마치 이모나 고모인 양 잘 따르는 사랑스러운 예빈, 일란성 쌍둥이로 이름 부를 때마다 날 곤혹스럽게 만드는 이슬과 다슬, 외모에 너무 관심이 많아 항상 거울을 끼고 사는 지혜 등등. 이렇게 여럿이 함께 1학년 5반 교실에서 인연이라는 야무진 끈으로 묶여 어제와 다른 오늘을 열심히 산다.
   간혹 예은이처럼 문제성을 소지한 아이도 있다. 상담을 해보면 나름의 전략인 듯도 하다. 담임의 사랑을 독차지해 보려는 나름의 전략을 세우고 머리에 왁스를 잔뜩 발라 한껏 부풀려 영락없는 사자머리처럼 해 가지고 올 때도 있고, 교복 셔츠를 일부러 삐죽 빼서 입어보기도 하고… 튀어보려 애쓰는 녀석의 순수한 맘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스럽다. 공부보다 공부 외의 것들에 관심이 많다 보면 유혹이 내뿜는 가속도에 휘말려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성품이 발라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을 녀석들도 있지만 한사코 담임인 내 손길과 관심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는 녀석들도 많다. 어른들의 부주의로 인해 각박하고 힘든 세상살이에 내몰려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단 1년이지만 올곧고 단단하게 성장하길 바란다.
   4월 초 ‘여럿이 함께’하는 모둠별 독서토론을 국어수업 시간에 한 적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5~6명이 모둠을 만들어 모둠에서 선정한 책을 읽은 후, 토론을 하는 형식이다. 책 선정부터 거의 싸움 수준이다. 삐쳐서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화내고 우는 녀석까지 속출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예쁘고 기특하다. 중 1 수준답게 활기차고 건강하다.
   결과물을 보면 아직 수준 미달에 함량 미달이지만 여럿이 함께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들이 영글어 갈 테니 걱정하지 않는다. 조금 더디고 조금 부족하다고 탓하거나 빨리 익기를 재촉하지 않는다. 각자의 수준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모둠의 모습들을 가만가만 지켜본다.
   ‘우리들의 교육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된다. 우리들의 교육은 우리들과 함께 시작된다.’는 루소의 말처럼 ‘여럿이 함께’ 살다 보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보태고 나누면서 서로를 좀 더 배려하고 이해하는 건강하고 반듯한 아이들로 성장할 것이다. 소유보다 ‘나눔’을, 경쟁보다 ‘어울림’을, 외톨이 천재보다 ‘여럿이 함께’의 미학을 선택하는 정 많고 사람 내 나는 아이들로 성장할 것이다.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