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지금까지 한글과 관련하여 지난 백 년 동안에 있은 일들을 더듬으며 한글의 오늘의 형편을 가늠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세계 학계가 한글을 일찍이 인류가 만든 가장 좋은 문자 체계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논증이 외국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점이 못내 아쉬움을 느끼게도 하였다. 오랫동안 우리 나라 학자들이 연구해 온 것이 그 밑받침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막상 아퀴를 짓는 일을 남의 손에 맡기고 만 것이다.

  한편, 19세기 말엽부터 한글 체계의 확립과 그 개선을 위한 여러 갈래의 노력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매듭이 지어진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글 체계의 개선을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들을 통틀어 볼 때, 희랍·로마 알파벳과 한글의 차이점들을 곧 한글의 단점으로 여겨 한글을 알파벳과 가깝게 고치려는 경향이 드러난다. 이것은 결국 한글을 희랍·로마 알파벳의 亞流로 만들려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경향을 극단적으로 보인 것이 가로 풀어쓰기의 주장이다. 縱書보다 橫書가 좋다는 생각, 음절로 모아쓰는 것보다 풀어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다름 아니라, 희랍·로마 알파벳을 문자의 이상으로 삼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글을 위대한 문자라고 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알파벳에 가깝게 고쳐야 한다고 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한글의 장점은 더욱 살리고 단점은 고쳐 나가는 것이다. 한글은 縱書도 할 수 있고 橫書도 할 수 있다. 이것은 희랍·로마 알파벳이 따를 수 없는 한글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장점은 앞으로 문자 생활이 다양해질수록 더욱 빛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음절로 모아쓰는 것도 결코 흠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앞에 놓인 긴 영어 단어나 독일어 단어를 읽으려 할 때, 어디어디서 음절로 끊어야 할까 망설여진다. 그러나 한글은 이미 음절로 모아썼으니 읽는 데 아무 불편이 있을 리 없다. 음절로 모아쓰는 것이 불리한 점이 더러 있다 해도, 그것이 가지는 유리한 점을 생각하면 조금도 꿀릴 것이 없다.

  우리는 한글의 특징은 살리면서 그 모자라는 점을 보완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모습을 존중하되 더욱 좋게 고치는 슬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 모든 문자는 實用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니, 실용의 편의를 위하여 꼭 필요하다면 학계와 사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서 고치는 것이 바람직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러 방면에서 일하는 사람이 체험을 통하여 얻은 생각을 모아서 한글의 개선 작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개인적인 문자 생활에서 느낀 두 가지 사실만 간단히 적기로 한다.

  첫째, 문자의 모양을 더욱 다듬어야 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에는 글자가 이렇게 깨알같이 작아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이나 사전을 보면서 ‘흥’인지 ‘홍’인지 ‘훙’인지 도무지 식별이 되지 않아 한참 들여다 볼 때가 가끔 있다. 지금까지도 한글 字體의 개량을 위해서 엄청난 노력이 이루어져왔음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창의적인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둘째, 위에서 검토한 여러 문제 중에서 당장 문자 생활에서 부딪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고유 명사 표기법이다. 이것도 서양의 영향을 받은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유 명사와 보통 명사를 식별하는 방법이 있었으면 하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한글의 경우에 새삼스럽게 大文字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窮餘之策은 될지언정 最善策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종래 쓰다 만 곁줄이나 밑줄을 긋는 법은 번거롭기 짝이 없다. 좋은 제안이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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