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 중진 학자의 짤막한 글이 그러한 위력을 발휘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서평이 나온 뒤에 간행된 言語學 槪論書들의 文字에 관한 章에 한글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되지만,4) 세계 文字史 내지 文字論이 한글의 새로운 자리 잡음으로 그 면목을 일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대표하는 저서로 샘슨(Geoffrey Sampson)의 ‘문자 체계’(Writing Systems, 1985)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제3장에서 인류의 초기 문자들, 4장에서 音節文字, 5장에서 子音文字, 6장에서 音素文字(희랍?로마 알파벳)를 논한 뒤에 7장에서 資質 體系(featural system)라 하여 한글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자질 체계란 이 책의 저자가 만든 새로운 술어다.

  종래의 분류 체계로서는 다른 어느 문자와도 다른 한글의 특성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고민한 끝에 새로운 체계를 설정한 것이다. 종래 음운론에서 몇 개의 자질의 묶음으로 음소를 정의하여 왔는데, 한글 글자들이 이 자질을 표시하고 있음에 착안하였던 것이다.

  샘슨의 이론은 우리 나라 학자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 학자들은 구미의 이론의 틀을 받아들여 그 틀에 사실을 맞추려고 애써 왔다. 이것만으로도 힘에 겨웠으니 그 틀을 벗어나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알파벳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음을 느끼면서도 이 느낌을 이론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샘슨은 한글 체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이론의 틀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틀을 바꾸고 말았던 것이다.

  샘슨의 자질 체계의 이론이 한글의 설명에 가장 합당한 것인가. 이 이론이 한글의 특질의 일면을 포착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한글의 특질을 남김없이 설명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한다. 앞으로의 연구는 이 점을 차분히 캐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한글 글자의 모양이 알려진 18세기 말엽, 19세기 초엽 이래, 그곳 학자들은 줄곧 한글을 어떤 다른 문자의 계통을 끄는 것으로 믿어 왔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文字史에서 얻은 관점을 한글에도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우리 나라의 현대 학자들은 한글의 독창성을 계속 주장하여, 한때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다. 60년대에 들어 구미 학자들이 한글의 독창성을 인정함에 이르러 우리의 오랜 숙원이 풀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외국에서 한글의 특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나타남으로써 우리의 학문하는 자세에 큰 결함이 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4) 예를 들면 D. Bolinger(1968) 170~171면, R. Burling(1992) 404~407면, 등.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