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렇듯 ‘制字解’는 한글 제작을 신비화하고 있음을 본다. 다만 聲音의 이치를 다한 것이라 한 대목이 우리의 눈길을 끌 뿐이다. 실제로 ‘制字解’의 28자에 관한 설명이 이 사실을 밑받침해 주기도 한다. 이 설명은 성음의 이치를 주로 중국에서 발달한 音韻學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이 중국 음운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음은 여러 글에 나타나는데, ‘解例’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과거의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독자적인 연구를 하였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이것은 아마도 이 이론을 한국어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중국어만을 대상으로 했던 중국의 음운학 이론을 한국어에 적용함으로써 하나의 일반 음운 이론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음운 이론은, 그 당시로서는, 동양과 서양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세종대왕이 발전시킨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中聲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音節의 二分法을 기본으로 했던 중국 음운학에는 中聲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이에 관한 이론은 세종대왕이 처음으로 수립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종대왕이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만들 구상을 하게 된 것은 음운학에 관한 깊은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文字學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은 문자[漢字]의 나라로서 이에 관한 학문이 발달되어 있었는데, 세종대왕은 이 방면의 이론도 널리 섭렵하여 그 알짬을 추려서 새 문자의 창제에 적용한 것이다.

요컨대, 세종대왕의 학문의 특징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있어서 파악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한글 창제의 기초가 됨으로써 한글은 일찍이 인류가 만든 가장 독창적인 문자 체계가 된 것이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한글 창제를 통하여 우리 민족과 인류의 문화에 영원히 남을 金字塔을 세운 것이다.

  위의 논술에서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세종대왕의 이름만을 들어 왔는데, 이것은 한글이 문자 그대로의 親制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申叔舟를 비롯한 학자들이 한글 사업에 관여한 것은 한글 창제 이후의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기문(1992)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는데, 그 뒤 매우 흥미 있는 새로운 자료를 李家源(1994)이 소개한 것이 있어 여기에 덧붙여 둔다. ‘竹山安氏大同譜’에 ‘貞懿公主遺事’가 실려 있는데 그 三則 중 第二則이 다음과 같다고 한다. 李家源(1994)의 번역을 덧붙인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방언이 문자로 더불어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비로소 訓民正音을 창제할 제, 變音과 吐着을 오히려 다 연구하지 못하여 諸大君으로 하여금 풀게 하였으나 모두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公主에게 내려 보내었다. 公主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상하고 특히 奴婢 數百口를 下賜하였다.

  정의 공주는 세종의 둘째 따님으로 延昌尉 安孟聃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족보에 이런 소중한 글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글 창제 중에 있었던 逸話를 전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세종이 한글 창제를 은밀히 진행하였고 간혹 답답할 때에는 至近의 아들 딸들과 의논한 情景을 눈에 보는 듯하다. 한글을 만든 뒤 첫 사업이었던 韻會 번역을 東宮, 首陽大君, 安平大君에게 감장토록 한 사실과 ‘洪武正韻譯訓’과 ‘直解童子習’의 序文에 文宗이 한글 창제의 일을 도왔음을 말한 사실을 들어 왕세자를 비롯한 아들들이 세종의 말벗이 되었음이 지적된 바 있는데(이기문 1992, 7면), 이제 공주까지 여기에 끼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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