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 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세기의 마지막 10년은 한글이 우리 나라 문자 생활의 전면에 떠오른 초창기로서, 사실상 한글 표기의 중요한 문제들이 거의 다 등장했고 구체적인 시안들이 제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 띄어쓰기와 고유 명사 표시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옛날에는 일반적으로 띄어쓰기가 없었다. 諺解나 이야기책(古典小說)에서도 띄어쓰기가 없었는데 甲午更張 이후에 圈點과 빈 칸에 의한 두 띄어쓰기의 방안이 나타난 것이다.

   권점 띄어쓰기는 ‘獨立誓告文’(1894년 12월 12일)에 보인다. 이 글은 國文, 漢文, 國漢文의 셋으로 작성되었는데, 國文과 漢文에 흑점이 찍혀 있음을 본다. ‘新訂尋常小學’(1896)과 이봉운의 ‘국문졍리’(1897)에는 圈環(동그라미)이 쳐져 있음을 본다. 주시경의 저서들을 보면 그가 띄어쓰기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는데 ‘월남망국?’(1907) 등 빈 칸 띄어쓰기를 한 것도 있으나 ‘국문초학’(1909)에는 흑점을, ‘국어문법’(1910)에는 권환을 썼고 ‘말의 소리’(1914)에 와서는 흑점, 권환과 아울러 겹침표(>)를 썼음을 본다. 그리고 권환은 위치를 달리하여 표시한 것이 주목된다. 매우 정밀하게 형태론적, 통사론적 사실들을 분석하여 표시한 것이다.5)

  이에 대하여 빈 칸 띄어쓰기는 무엇보다도 ‘독립신문’이 채택함으로써 보급되었다. 이것이 영어를 비롯한 서양 언어들의 맞춤법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영국 공사관의 스코트가 쓴 ‘언문말?’(1887)과 언더우드의 ‘韓英文法’(1890)을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의 책에서 빈 칸 띄어쓰기의 예들을 볼 수가 있다. 미국에서 영어의 빈 칸 띄어쓰기를 익힌 서재필이 국어에서도 이 방법을 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호의 ‘논셜’에서 “귀졀을 ?여” 쓸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시행하였고 같은 신문 2권 92호(1897년 8월 5일)에 실린 국문에 관한 ‘논셜’6) 에서도 옥편(사전) 편찬과 함께 빈 칸 띄어쓰기를 가장 힘주어 말한 점으로 보아, 그가 이 방법에 각별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와서 위에 든 띄어쓰기의 두 방법 중에서 빈 칸 띄어쓰기가 점차 세력을 얻어 드디어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이것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두 가지 사실을 덧붙여 둔다. 첫째, 19세기 말로부터 띄어쓰기는 주로 순국문체에서 시행되었다. 國漢文混用體는 띄어쓰기를 몰랐었다. 둘째, 띄어쓰기에 있어서는 주시경의 제자들이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김두봉의 ‘조선말본’(1916)이 아예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음은 권덕규의 ‘朝鮮語文經緯’(1923)을 비롯하여 그 뒤의 여러 책과 同人誌 ‘한글’(1927년 7월~1928년 10월)이 빈 칸 띄어쓰기를 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띄어쓰기는 전반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신문, 잡지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맞춤법의 규정이 느슨한 것부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간행물이 지킬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립신문’을 보면 오른쪽에 傍線을 그어서 고유 명사임을 표시하였다. 國名이나 地名에는 複線을, 人名에는 單線을 그어서 구별하였다. 그런데 이 신문은 제1권 102호까지만 이 傍線法을 보여 주고 그 다음 호부터는 그것을 폐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 傍線法은 중국에서 간행된 ‘泰西新史’를 學部에서 번역한 국문본(1897)에서도 발견된다. 이 책에서는 國名이나 地名은 오른쪽에 複線을, 人名은 왼쪽에 複線을 그어 구별한 점이 다르다. 이봉운의 ‘국문졍리’(國文正理, 1897)의 傍線法은 ‘독립신문’의 그것과 같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이 방법이 계승되었다. 최남선이 간행한 잡지 ‘少年’이 그 일례인데, ‘靑春’에서는 이것을 하지 않고 있다. ‘독립신문’과 같은 길을 걸은 듯하여 흥미 있다.

  이렇듯 고유 명사의 방선 표시법은 널리 행해지지 않았는데,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附錄 2. 文章 符號)에서 “固有名詞를 表示하고저 할 적에는 縱書에서는 左傍에 單線을 긋고, 橫書에서는 下線을 긋는다.”고 규정한 점이 주목된다. 그 방법이 번거롭고 보기에도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개정판에서도 이 규정이 유지되었음은 고유 명사 표시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요즈음의 간행물들을 보면 고유 명사 표시는 거의 포기하고 있다. 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한글 학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큰 사전’(1947~1957)은 고유 명사에 下線을 그었으나 ‘우리말 큰 사전’(1992)은 아무 표시도 하지 않고 있다. 간혹 인용부(낫표, 작은따옴표)를 한 글을 보기도 하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특수한 예로서, 한국판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人名이 처음 나올 때 고딕체로 표기하고 있다.
5) 옛날에도 권점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龍飛御天歌’는 국문 가사와 漢文 문장에서 구절에 권환을 쳤다. (이와 형식이 동일한 ‘月印千江之曲’에 권환이 없음을 지적해 둔다.)
6) 이 논설에 대해서는 이기문(1989)에서 자세히 논하였다.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