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이 한 통의 전화로 말미암아 2년간의 국립국어연구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1995년 2월 초로 기억이 된다. 박양규 교수께서 조용히 지내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전화를 하셨다. 아무래도 연구원에서 근무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듯하여 어렵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고 십여 일이 지난 후에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여 박양규 교수께 전화를 드렸다.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되어 '파란만장한' 2년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국어연구원에서 보낸 시간은 참으로 나에게는 유익한 것이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정을 배웠고 많은 일들에 파묻혀서 세상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박양규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국어연구원 생활을 뒤돌아보기로 한다.
내가 송민 원장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다닐 때였지만 그때의 기억은 어렴풋하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아마 1982년경 가을로 기억되는데, 신림동 허름한 대폿집에서 뵙게 되었다. 이병근 선생님이 몇 사람을 지휘하여 간 곳인데, 모자를 쓴 송민 원장님이 혼자서 술상을 받아 놓고 계셨다. 그 멋진 모습이 아주 강렬하게 뇌리에 심어졌다. 그 후 또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난 뒤, 확연히 달라진 말쑥한 모습의 송민 원장님을 국어연구원에서 만나 뵙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송민 원장님의 성품, 생활 태도, 학문에 대해서 내가 언급한다는 것은 내 능력의 밖이기도 하고 외람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원장님의 혼사 때에 부조랍시고 약소한 성의를 보내 드렸는데 이를 상품권으로 되돌려 주신 '매정한' 분이란 말은 꼭 하고 싶다. 그 상품권을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사용할 수가 없어 애를 먹은 기억도 새롭다. 지금도 원장님을 뵈면 편안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국어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할 때에 나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은 강인선, 김희진, 전수태, 김옥순 선생이다. 소위 '노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점심을 혼자 먹지 않도록 애써 주신 분들이고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걱정해 주신 생명의 은인들이다. 특히 강인선 선생은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국어연구원을 떠나실 때 의례적인 환송회를 해 드렸을 뿐 고맙다는 말씀을 한 번도 드리지 못했고, 대학에 취직하셨을 때도 축하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나마 이런 말씀을 드려야겠다.
최규일 부장님과 설의웅 부장님,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박민규, 이현우, 조남호, 양명희 선생과 이웃 부서의 김세중, 최용기, 정호성, 임동훈, 허철구, 정희원, 박용찬 선생께도 도움만 받고 보답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기 짝이 없다. 그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고 그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이분들께 고맙다는 말씀과 죄송하다는 말씀을 함께 드린다.
국어연구원에서 근무한 초기에, 한글학회에서 편찬한 『국어학 사전』의 간행을 놓고 고심한 적이 있다. 다 아시겠지만 당시의 문화체육부의 연구비로 이루어진 사전인데 그 표기법이 '한글 맞춤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한글학회와 문화체육부의 견해를 서로 존중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중·일 삼국의 표준 한자를 제정하는 사업은 199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그해 여름 중국과 일본의 담당자들이 국어연구원에 모여서 사업 계획을 논의하였다. 다음 해에는 민병수 교수, 심경호 교수, 이준석 선생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鴨樂泉 語言文字應用硏究所 副所長, 季恒全 語言文字應用硏究所 前副所長 등과 이 사업을 논의했다. 민병수 교수께서는 당시에 大夫人의 병환을 걱정하셨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변고를 맞으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이준석 선생은 통역으로 왔던 백광률 선생과 잠시 사라져서 밤 늦게까지 걱정하였던 기억도 있다.
1995년 봄에 안병희 선생님께서 중국의 연변 대학에서 보낸 초청장을 보내 주셨다. 연변 대학에서 남북 어문 규범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에 혼자서 연길시에 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여행이었다. 며칟날 몇 시에 연길시에 도착한다는 통지를 연변 대학의 관계자들에게 하였는데 도착해 보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하마 올까 하마 올까 하고 기다렸지만 여행객이 모두 떠난 후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점점 두려움이 몰려왔는데 어쩔 수 없이 조선족 택시 기사에게 운명을 맡기고 아무 호텔이나 가자고 했다. 몇 군데를 돌아보았지만 객실을 구하지 못하다가 한참을 돌고 난 후 겨우 누울 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튿날 아침 늦게서야 겨우 연락이 되어 연변 대학 숙소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는 장마가 진 후라서 호텔의 물이 진흙탕이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 흙이 가라앉고 나면 윗물을 조심스레 퍼서 겨우 몸을 씻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홍윤표 교수와 허철구 선생이 마침 그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계셨는데, 한국에서처럼 한 통의 전화로 비행기 예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비행기 예약을 허철구 선생께 부탁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거기에서 비행기 예약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것이었다. 이 일 때문에 나중에 홍윤표 교수로부터 걱정을 들은 일도 있다.
다음 해(1996)에는 장춘에서 남북 어문 규범에 대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에는 안병희 선생님, 임홍빈 선생님, 양명희 선생, 조현나(문체부) 씨와 함께 가게 되었고 북쪽에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심병호 국어사정위원회 위원장, 선우용화 언어학연구소 부소장, 최정후, 한선희 선생 등 6명이 참석하였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였고 회의 내용도 진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두 만족한 회의라 생각한다. 그런데 마지막 송별을 하는 자리에 우연히 남측의 기자들이 들렀는데 이게 빌미가 되어 잠시 동안 험한 분위기가 되었으나 곧 오해가 풀려 이전의 분위기를 회복하였다.
사전 편찬실의 수고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연구원들은 물론이고 편수원과 편수 보조원들의 희생적 노력이 없었다면 『표준국어대사전』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지원을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국어연구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뜻밖의 일을 한 경우도 있다. 당시의 문화체육부에서 점자를 개정, 통일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자문위원회의 의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점자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는 것이 없어서 무척 난감했는데 회의만 주재해 달라는 주문만 수행하는 것으로 하고 그 직책을 맡아 대과 없이 일을 마쳤다. 실무적인 문제는 김희진 선생이 맡아서 애를 많이 쓰셨다.
2년 가까이 국어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국어연구원은 명실상부하게 국어를 연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행정적인 업무가 너무 많이 주어져서 연구원의 업무는 과중하였고, 국어연구원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원은 너무 적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정신적 풍요를 약속하기 위해서는 국어연구원의 활성화, 연구원이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부장의 업적을 제대로 이어받아서 바른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였는지 의문이고 다음 부장께도 도움되는 일을 하였는지도 의문이다. 스스로 그렇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 죄송스럽고 국어연구원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회고와 바람
2년간의 국어연구원 생활
서종학 / 제3대 어문규범연구부장 역임·영남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