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치'와 '겜맹'
박용찬(朴龍燦) / 국립국어연구원
인간 사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한다. 언어도 그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사라지거나 생겨나면서 그에 대한 말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회의 변화 속도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급격한 사회 변화로 하여 새말 즉, 신어가 더욱 더 필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말은 아예 새로이 만들어내기보다는 현존하는 말들을 적절히 응용·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대부분이다. 즉, 새말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말들을 가지고 그것에 약간 변형을 가해서 만들어 낸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한자어계 접사를 이용해서 새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만들어져 사용되는 신어 목록를 살펴보면 몇몇 특이한 한자어계 접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은 본래는 접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던 것이었는데 최근 들어 접사로서 아주 생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치(癡/痴)'와 '맹(盲)'을 들 수 있다.
(1)의 '길치(-癡)'와 '몸치(-癡)'는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2000년 신어"에도 올라 있는 신어들인데 이들 신어에 보이는 '치'는 '癡' 또는 '痴'로 일부 한자 뒤에 붙어 '어떤 사물에 잘 적응하지 못함' 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런 속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2)의 '컴맹'과 '넷맹'도 각각 국립국어연구원이 펴낸 "신어의 조사 연구"(1994)와 "2000년 신어"에 올라 있는 신어이다. 이들 신어에 보이는 '맹'은 '盲人'이 줄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일을 할 줄 모름. 또는 그럼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먼저 '치(癡/痴)'는 아래 (3)의 '음치(音癡)', '백치(白癡)', '서치(書癡)', '정치(情癡)', '천치(天癡)' 따위처럼 일부 한자 뒤에 붙는 말로 현대어에서 자주 쓰이는 편이라 하기 어렵다. (1)의 '길치'과 '몸치'는 이 예들에 유추되어 만들어진 말로 '길을 잘 찾지 못하고 한 번 갔던 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과 '춤을 잘 못 추는 사람'을 각각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 예에서 '치(癡)' 앞에 오는 말인 '길'과 '몸'은 순수 고유어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현대어에서 '치(癡)'는 그 앞에 오는 말이 한자로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그 기능도 거의 접미사화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치'는 아래 (4)의 예에서처럼 신어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색치(色癡)'는 '색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이 매우 무디어 색을 바르게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함. 또는 그런 사람'을, '박치(拍癡)'는 '박자(拍子)에 대한 음악적 감각이나 지각이 매우 무디어 박자를 바르게 인식하거나 발성하지 못하는 사람'을, '기계치(機械癡)'는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을 각각 가리킨다.
반면 '맹(盲)'은 본래 아래 (5)의 예들에서처럼 일부 한자 뒤에 붙어 '눈멂. 눈먼 사람'을 의미한다. (2)의 '컴맹'과 '넷맹'은 각각 'computer+盲人'과 'internet+盲人'으로 분석되며 '컴퓨터에 대해 무지함. 또는 그런 사람'과 '인터넷을 전혀 사용할 줄 모름.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 예에서 '맹(盲)' 앞에 오는 말인 '컴'과 '넷'은 외래어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대어에서 '맹(盲)' 또한 '치(癡/痴)'와 마찬가지로 그 앞에 오는 말이 한자로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그 기능도 거의 접미사화한 느낌마저 준다.
'맹(盲)'은 아래 (6)의 예에서처럼 신어를 만드는 데 아주 생산적이다. 여기에서 '겜맹'은 'game'과 '盲人'이 결합한 말로 '컴퓨터 게임을 전혀 할 줄 모름. 또는 그런 사람'을 '책맹'은 '책(冊)'과 '맹인(盲人)'이 결합한 말로 '문자도 알고, 일정 교육도 받아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책 읽기를 싫어함.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