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어원

이판사판

 

조항범(趙恒範) / 충북대학교

우리 민족이 수용한 외래 종교가 여럿이지만 불교만큼 우리의 정신 세계와 실제 생활에 두루두루 영향을 미친 종교도 드물다. 우리 삶의 곳곳에서 불교의 체취가 역력한데 언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말의 얼마간은 불교용어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용어로부터 국어화한 단어들이 많다. ‘아수라장’, ‘아비규환’, ‘야단법석’, ‘이판사판’ 등과 같이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들도 불교용어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들 중에서 ‘이판사판’은 아주 독특한 단어이다. ‘이판사판’ 자체는 불교용어가 아니지만 이 단어를 구성하는 ‘이판’과 ‘사판’은 불교용어이기 때문이다. ‘이판’(理判)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도를 닦는 일을 말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이판승’ 또는 ‘이판중’, ‘공부승’이라고 한다. ‘사판’(事判)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일’(이것을 ‘山林’ 또는 ‘産林’이라 한다)을 말하며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스님을 ‘사판승’ 또는 ‘사판중’, ‘山林僧’이라고 한다. ‘이판’과 ‘사판’은 아주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다. ‘이판(승)’이 없으면 부처님의 외외(巍巍)한 가르침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잘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판’과 ‘사판’이 결합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가 ‘이판사판’이다. 이것은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판’ 또는 ‘사판’이 지니는 의미와 아주 다른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가 어떻게 ‘이판’과 ‘사판’의 의미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대단히 궁금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은 그렇게 신통하지 못한 편이다.
    어떤 사람은, 조선 시대에 스님이 아주 낮은 신분이어서 이판승이든 사판승이든 스님이 되는 것은 인생의 끝이기 때문에 ‘이판사판’에 ‘마지막 궁지’ 또는 ‘끝장’이라는 의미가 붙었다고 하나 쉽게 믿기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 이외에 세 가지 정도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스님의 길은 이판 아니면 사판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기에 그러한 극단적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극한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추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닌 듯싶다.
    또 하나는, 이판승과 사판승이 갈등·대립한 시절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판’과 ‘사판’을 이용한 극단적 의미 표현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다. 서로 갈등·대립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 극단적 감정을 갖게 마련인데,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극단성’을 지니는 의미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판’과 ‘사판’의 특성을 고려해서 해석해 보는 것이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용맹 정진하는 ‘이판’의 비장한 행위와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판’의 파렴치한 행위는 모두 ‘이판사판’의 ‘극단성’ 내지 ‘무모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판사판’의 의미 변화 과정을 속단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이판’과 ‘사판’의 합성어라는 사실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여러 폐해를 낳고 있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판사판’을 ‘2판4판’으로, 또는 ‘사’를 ‘死’로까지 바꾸어 ‘이판死판’으로 이해한다. 심지어 ‘판’을 ‘한 판’, ‘두 판’의 ‘판’으로 이해하여 ‘이판새〔新〕판’(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판), ‘이판저판’(이런 일 저런 일)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쓰고 있다. 정말 ‘이판사판’식 새말〔新語〕 만들기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