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의 속담】

한국 俗談의 言述 構造, 比喩法 그리고 敍事體에 관한 연구

金烈圭 / 인제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Ⅰ. 속담의 內在的 言述 構造

  俗談은 俗信 및 俗念와 함께 한 묶음으로 範疇化할 수 있다. 이들은 크게 보아서 <民俗 思想> 내지 <民間 觀念>를 이루는 한 동아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들은 원칙적으로 民俗 思想을 이루는 單一 文章의 述 傳承이라는 屬性, 그것도 日常的 述 傳承이라는 屬性을 나누어 갖고 있음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民俗의 文>인 이들 傳承들은 日常生活 그 自體가 巨大 脈絡 또는 巨大 狀況을 이루고 있는 속에서 對話라는 微少 脈絡을 더불어서 使用되고 있는 言述이요 텍스트다. 그런 뜻에서 이들 傳承은 <言述의 民族誌>라고 할 만해진다.1)
  民俗 思想(또는 民間 觀念)은 크게는 世界觀이며 人生觀, 事物觀, 價値觀 등은 물론이고 倫理的 規範, 社會的 規範 그리고 實踐的 生活 指針까지를 포괄한다. 그것은 傳統的이고 또 慣例的인 것이다. 融通性 있는 固定觀念 및 그 體系로서 社會 속에서 受用되고 通用되고 또 活用된다. 주어진 공동체 안의 동아리들은 이에 의해 세계와 사물을 두고 思索하고 또 判斷한다.
  물론, 神話, 民譚, 信仰 등도 훌륭하게 民間 觀念(또는 民俗 思想)을 獨自的으로 포괄하고 또 서로 어울려서 그것을 形成하기도 한다.2) 때로는 이들 民間 傳承은 한 篇으로도 自足的인 한 單位의 民俗 思想을 形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抽象的 體系로서 思想이나 觀念을 직접 提示하지는 않는다. 또 提示하는 것을 主機能으로 삼지도 않고 目的 삼지도 않는다. 그러나 俗談, 俗信, 俗念은 한 편, 한 편이 그 자체로 한 單位의 民間 思想을 직접 具現함과 함께 서로 어울려서 잘 갖추어진 體系로서 民間 思想을 抽出할 수 있는 端緖가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한 文化 集團의 構成員들이 그것에 기대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創造的 거푸집 내지 태형(胎形)이 된다. 各 構成員들로 하여금 共同體的 同質性 및 自己 證明을 確保하고 있는 바탕 위에서, 한 덩치의 관념이나 사상이 아니고, 잘 갖추어져 서술(敍述)된 한 단위의 관념이나 사상을 표백(表白)하게 한다.
  이들 <民俗文>들은 특히 그 가운데서도 속담은 그 구체를 微視的 텍스트로서 포괄하고 있는 한 단위의 거시적 텍스트 속에서 意味論的인 核 觀念, 곧 主題를 形成하면서 論證, 說得, 說明 등에 걸친 言述的 機能을 수행한다. 그때 發說者 곧 俗談을 연행하는 당사자는 전통을 비롯한 기성의 사회적 권위, 규약, 규범 등에 크게 의지하게 된다. 동시에 演行者는 聽話者와 함께 기성적 사회적 규범을 강화하고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하는 것이다.
  演行 현장에서 속담은 對話(訓戒, 敎示, 說得, 論證 등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라는 거시적 텍스트 내지는 맥락(컨텍스트) 속에 껴들어 있으면서 그 자체의 독자적인 양식상의 징표를 갖추고 있다. 즉 <民俗的인 對話의 장르>라고 부를 만한 속담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앞뒤의 대화 맥락 속에서 그 자신이 개성적으로 판별될 수 있는 주체적 징표 내지 양식적 징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옛말에……말했듯이……”라든가 “속담에 말하기를……” 아니면 “……라는 말도 있듯이……”와 같이 말머리를 일으키는 혹은 말 맺음을 하는 <話題 轉換의 裝置>를 더불어서 속담이 사용되고 있음을 우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對話 전체의 흐름의 차단이 아니라 發話者가 속담에로 聽話者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對話의 요점(要點)을 따로 浮刻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대화의 흐름을 강화하고 증폭시키는 것이다.
  話題 轉換의 장치는 이를테면, R. 야콥슨의 <여섯 가지 언어 기능> 가운데의 <메타언어적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中世紀 小說이나 판소리에서 볼 수 있는 “각설하고……”에 견주어져도 좋을 것이다. 이 장치에 의해서 문맥 위로 떠오르거나 문맥 앞뒤에서 따로 두드러지게 되는 속담은 그 자체의 특이한 양식 또는 텍스트 징표에 의해서 다시금 더 한층 강하게 떠오르거나 두드러지게 된다. 속담이 <對話의 장르>라고 호칭되는 속성이 여기 있는 것이지만 그 俗談이 對話 脈絡에 묻히게 되지 않는 보장을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이다.
  속담은 스스로를 특징짓는 <자기 지시적>(self-referencing)3) 이고도 시적인 양식을 갖춤으로써 앞뒤 脈絡과 다른 個別性과 그로 말미암은 獨立性 내지 遊離性을 증강한다. 그 결과, 전체 대화의 맥락 속에서 磁極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遊離性(detachability)4) 이란 속담이 대화의 핵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구실을 하면서도 나머지 대화 맥락에서 떠오르거나 두드러지는 것만큼 독립성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령,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흔한 속담을 보기로 들어 보자. 여기 일정한 <문체 안정의 법칙> 내지 <양식 균형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리라는 느낌은 누구나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중문(重文)이 하나로 엮어진 <二元 構造>를 그 문체 안정의 법칙이 지켜 내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 二元 構造는 對比(類似成)와 對照(差別性)를 동시에 간직한 對句를 형성하고 다시 그 속에 율동감이 있는 반복성을 내장(內藏)하고 있음을 쉽게 보아 낼 수 있다. 이런 속성은 二元 構造가 두드러져 드러나는 속담들에 걸쳐 보편도 높게 지켜지고 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인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말 새끼는 제주도로 사람 새끼는 서울로
가는 말이 오와야 오는 말이 곱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
불 없는 화로, 딸 없는 사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소더러 한 말은 안 나도 처더러 한 말은 난다.
난 부자 든 거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그러나 다음과 같은 單文인 속담에서도 二元 構造의 흔적을 보아 낼 수 있다.
칼로 파리 치기
노닥노닥해도 마누라 장옷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개 발에 편자
코딱지 두면 살이 되랴.
자는 범 코침 주기
호랑이에게 개를 꾸어 주다.
  이들은 “주어부/서술부” 그리고 “한정부/피한정부” 사이의 대조에 의해서 <單文 속 二元 構造>가 엮어져 있는 속담의 보기들이다. 이런 뜻에서 重文 二元 構造이건 아니면 單文 二元 構造이건, 對句를 엮는 二元構造는 속담이 지닌 양식상의 또는 문체상의 중요한 변별적 특성이 될 수 있다. 속담이 <균형의 언술>(Locution de la symétrie)5) 이라고 일컬어질 때 이 같은 二元 構造의 對句性이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다음 속담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인다.
A B C D
와 같이 四分節한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A : B ≠ C : D
와 같이 기호화되어서, A에게 있어서 B인 관계는 C에게서 D인 관계와는 다르다(대조적으로 다르다.)라는 추상화된 심층적 四元 構造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계열의 속담으로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소더러 한 말은 안 나고 처더러 한 말은 난다.” 등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 없는 화로, 딸 없는 사위”의 경우는
A : B = C : D
와 같이 기호화되어 “A에게 있어서 B의 관계는 C에게 있어서 D의 관계와 같다.”라는 추상화된 심층적인 四元 構造가 속담 속에서 내재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A : B ≠ C : D
A : B = C : D
  이 두 추상 형식을 나란히 놓고 보면, 전자가 이원적 대조를 내포한 사원 구조의 균형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서 후자는 이원적 대비를 내포한 사원 구조의 균형을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은 전자를 소극적 내지 부정적 균형, 그리고 후자를 적극적 내지 긍정적 균형이라고 불러서 서로 구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사원성을 내포한 이중 구조의 균형임은 공통으로 지적될 수 있다.6) 여기서 우리들은 그레이마스(Greimas)가 속담을 <二元的 律動 構造>와 <反對의 짝>의 結合으로 설명코자 한 것을 연상하게 된다.7) 한편
A : B ≠ C : D
A : B = C : D
라는 서로 다른 추상 형식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절충 형식도 지적될 수 있다. 이것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에 적용될 것이지만, 이것에서 “A와 C는 대조적으로 다르지만 결국 A에게서 B의 관계는 C에게서 D의 관계와 같다.”라는 심층 구조를 이끌어내게 된다면 대조와 대비를 동시에 갖춘 사원 구조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속담은
A : B = C : D
의 변이형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A : B = C : D
에서 A:D=A:A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분석만으로도 세 가지의 <사원 분절을 내장한 대구의 이원 구조에 의한 균형>이란 속담의 양식 안정의 법칙을 추출해 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를 고려하게 되면 균형 그 자체에 등차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속담은 역전 내지 전도(顚倒)로 마무리되고 있거니와 이것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양쪽 끝에 같은 무게의 물건을 하나씩 올려놓은 저울대의 균형과도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등가(等價) 내지 등량(等量)의 균형이다. 하지만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는 逆과 逆의 균형이다. 전자를 <順均衡>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는 <逆均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逆의 相似>와 <順의 相似>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지만, 逆의 相似는 實體와 그것이 물 표면에 던진 그림자와의 상호관계에 견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박연암은 實體와 그림자를 두고 “惡得相似”라고 했지만 그것은 相似 속의 逆을 보아 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몇 가지의 <均衡의 言述>은 속신이나 수수께끼 등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는 것이지만 이로 말미암아 俗談은 그 사촌 장르들을 더불어서 暗記性과 演行性을 드높일 수 있는 定型性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이 같은 유형의 속담을 順接 構造(syntagmatic structure)가 아닌 竝立 構造(paradigmatic structure)를 취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A : B ≠ C : D
A : B = C : D
A : B = A : D
  어느 경우를 두고 보더라도 속담은 그 자체의 강한 텍스트성 내지 코드성을 갖추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텍스트 내부의 강한 독자적인 구속성이고 규율감이다. 일상 언어, 특히 속담을 에워싸고 있는 대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엄밀한 언술>이 곧 속담이다. 필수적으로 <대화의 장르>가 아닌 속신, 그리고 속담과 마찬가지로 <相面의 장르>이긴 하지만 앞뒤 대화의 맥락이 결여되어도 무방한 수수께끼에서는 적어도 대구의 균형성이 상대적으로 덜 엄격할 수 있는 것이다.
  텍스트 내부를 조직하는 엄격성 혹은 규율성은 이미 속담이 <시적인 언어>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게 된다. 시가 다른 종류의 언어와는 달리 그 자체로 내재적인 텍스트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시는 자체 구속적인 언어다. 이것은 시가 <메시지> 그 자체를 전경화(前景化)하는 언어이면서 언어 그 자체에 깊이 배려하는 <메타 언어적 기능>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시는 무엇보다 그 자신의 언어성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는 언어다. 속담은 사분절 될 수 있는 二元的 균형이란 큰 테두리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통제한다. 필경, 반복이나 <아소난스> 그리고 율격도 이 균형의 또 다른 세부적 징표라고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속담은 시가 그렇듯이 그 균형의 양식을 앞세워서 <시적 탈법>(Poetic Violation)을 감행함으로써 다시 한 번 더 그 자체가 <시적인 언어>에 속하고 있음을 과시한다. 이때 이 탈법 현상이 균형의 양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가령,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할 때, 이 명제는 이른바 <문자 그대로는 불가능>의 상황이거나 사건을 말하고 있다. “호랑이에게 개 꾸어 주기”도 문자 그대로만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할 경우도 문자 그대로나 또 현실적으로나 양 쪽 모두 불가능하다. 이같은 양면적인 불가능을 함축한 명제 그것을 <탈법의 명제>라고 부르거나 <유사 또는 의사(擬似) 명제>라고 부른다면 그것을 시적인 탈법 내지 <시적 특권>에 준해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속담은 불가능의 과장, 탈법의 과장에 의해서 그 실리적 효용성을 역으로 드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Ⅱ. 속담의 비유법

  관계의 비유법인 유추도 당연히 포괄해서 속담의 비유론을 우리들은 두 가지 차원에 걸쳐서 전개할 수 있다. 하나는 텍스트 내재적인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의 연행에서 생기는 차원이다.
A : B = C : D
A : B ≠ C : D
A : B = A : D
  이 세 가지 등식(부등식)은 속담이 <유추의 이원 구조> 또는 <유추의 이원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언술임을 익히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곧 속담이 지닌 텍스트 내재적인 유추 관계 또는 비유 관계이다.
낮말은 새가 듣는다 (그렇듯이) 밤말은 쥐가 듣는다.
사람 말을 듣기로는 새는 쥐와 같다.
라고 속담을 달리 기술하게 되면 속담이 유추 및 비유법을 그 텍스트 구성 원리 곧 코드로 삼고 있음을 보아 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 유추의 원리는 二元 構造의 두 단위 사이에서 구축되고 있는 것이지만, 이들 두 단위 곧 (A:B) 및 (C:D) 안에는 각기 “새가 사람 말을 듣는다.” 및 “쥐가 사람 말을 듣는다.”라는 의인법을 겸한 은유법이 내장되어 있다. 이것은 이 속담의 총체적 구조인 유추 속에 닷 부분적인 은유법이 내장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적어도 한국 속담의 일부가 <은유를 내장한 유추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헤아리게 해 줄 것이다.
  이 같은 두 겹의 비유법, 이를테면 총체적인 유추 속에 부분적인 은유가 껴들어 있는 비유의 이중 장치는 다른 보기의 속담에서도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운은 하늘에 떠 있고 떡은 시렁에 얹혀 있다.”와 같은 속담에서 일단 총체적인 유추의 관계는 쉽게 추정될 수 있다. 뭣인가의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는 운과 떡이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추는 대비의 유추, 말하자면 A와 B의 두 항, 그리고 C와 D의 두 항 사이의 각자의 관계가 서로 같다는 유추에만 그쳐 있지는 않다. 그와 동시에 둘의 관계가 서로 다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운은 하늘의 몫이어서 사람으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자리, 손에 넣을 수 없는 자리에 있음에 비해 떡은 언제나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운명은 ‘하늘의 별 따기’라면 떡은 ‘지상의 꽃 따기’다. 운명이 적어도 떡 만지듯 할 대상이 아님에 대해 엄숙히 판단하고 또 선언하고 있는 이 <민중의 선언>인 속담은 매우 교훈적이고 인생론적이다. 이 같은 유추를 <대조의 유추>라고 불러서 <대비의 유추>와는 구분하고 싶다. 운명과 떡 양자 사이의 고리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역으로 그 고리를 잘라서 서로 절연시키고 있기에 <절연의 유추>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 하다.
  “운은 하늘에 떠 있고 떡은 시렁에 얹혀 있다.”는 속담의 총체적 구조가 유추에 걸려 있지만 (A:B=C:D)에서 (A:B)는 문자 그대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능인 은유인데 비해서 (C:D는 문자 그대로나 현실적으로나 가능한 비유 없는 서술법이다. 결국 이 속담의 총체적인 (대조의) 유추는 바로 이 (은유:非비유)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로써 비현실과 현실, 불가능과 가능의 대비가 생기고 운명은 현실 저 너머의 손에 넣기 블가능한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C: D)가 있으므로 “운명은 결코 시렁 위에 얹힌 떡과 같을 수 없다.”는 운명과 떡 사이의 부정적 유추가 가능해짐을 다시 한 번 더 지적코자 한다. 결국 우리들은 이 운명론적인 속담을 총체적인 대조의 유추 속에 세부적으로는 非비유법과 짝 지워져서 그 비유성이 강조된 은유를 내장하고 있는 속담이라고 규정짓게 될 것이다.
  대비 또는 대조의 유추라는 총체적 구성 원리 속에 부분적인 비유법을 내장하고 있는 언술이 곧 속담이란 사실로 해서 우리들은 속담은 내재적으로도 비유적 언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물론 이 명제는 모든 속담에 두루 적용될 수는 없다.
형만 한 아우 없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게도 구럭도 다 잃었다.
등은 비유법 없는 평서법의 속담들이다.
  속담은 그 내재적인 유추 및 비유법에 겹쳐서 또 다른 유추 관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속담의 지시적 의미가 아닌 함축적 의미에서 문제될 유추법이다.

  Sgd
  =========
  Sgd
  ---------
  Sgr

  일차적인 능기(能記=Sgr)와 소기(所記=Sgd)를 발판으로 해서 이룩되는 이차적인 능기가 곧 함축적 의미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일차적인 소기는 지시적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미 작용의 { 표현        
  일차자원 내용 = 표현 { 의미 작용의
            내용 이차 차원

라는 또 다른 도식으로 속담의 구조가 설명될 때8), 이것을 우리들은 옐므슬레프&(Hjemslev)의 앞에 들어 보인 등식과 대비시켜 볼 수 있다. 속담의 지시적 의미와 함축적 의미의 차원(일차 차원과 이차 차원)을 달리는 <속담 상황의 의미 작용>과 <현실 맥락(컨텍스트)상황의 의미작용>으로 구분하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9) 이 같은 구분을 통해 속담의 의미 작용을 포착코자 하는 것은 속담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기댄 함축적 의미를 궁극적으로 전달코자 하는 언술이란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속담은 바로 이 같은 지시적 의미와 함축적 의미 사이에 또는 속담 상황의 의미와 (현실) 맥락 상황의 의미 사이에 유추 관계 내지 비유의 관계가 설정되는 있는 언술이다. 텍스트 겉으로 이미 들어나 있는 의미와 텍스트가 일깨우게 될 감추어진 의미 사이에서 유추 및 비유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속담의 텍스트 내재적인 유추 및 비유법과 맥락 상황의 유추 및 비유법에 극히 일반화될 수 있는 함수 관계가 있음을 찾아내기는 어려우나 국지적이고도 부분적인 함수 관계를 일정한 제약 아래서 찾아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에서 (A:B)의 관계는 <내포>의 관계다. 가령 “불 땐 굴뚝에 연기 나다.”로 고쳐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지거니와 이것은 영국 속담, “Where there’s smoke there’s fire”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가던 날이 장날이라.”에서는 <A:B>의 관계가 <등식>의 관계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에서는 <A:B>의 관계가 <인지認知)>의 관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 속담의 <A:B>의 관계가 내포, 등식, 인지 중의 어느 것이든 간에 그 관계의 탈법성의 정도와 맥락 상황의 의미 작용에서 유추가 갖는 비중의 크기는 대체로 정비례한다고 보여진다. 말하자면, 탈법성이 현저하면 유추의 관계도 현저해지고, 역으로 탈법성이 감쇄되면 유추의 관계도 감쇄되는 대체적인 경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구두 잘못 사면 한 해 고생이고 아내 잘못 얻으면 평생 고생이라.”라는 속담은 맥락 상황의 의미 작용을 일으킬 유추의 관계가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것은
쥐 먹을 것 없어도 사위 먹을 것은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
형만 한 아우 없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인다.
와 같은 속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는 그 탈법성으로 말미암아 맥락 상황의 의미 작용에서 유추가 다할 몫을 키워 주고 있다. 이 점은
개 발에 편자
불(고환)을 두고 장가간다.
등과 같은 속담에서도 비슷하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속담 상황 아닌 맥락 상황의 의미 작용은 대화 현장의 화자와 청자 사이의 상호관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것은 속담 상황의 의미 작용과 맥락 상황의 의미 작용 사이에 있을 유추 관계가 화자의 청자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 영향 받음을 의미하고 있다. 가령,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우물 흐리게 한다.
A B R
라는 속담을 생각해 보자. 맥락 상황에서 야구 코치가 연습을 게을리 하는 한 선수에게 이 말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미꾸라지=선수, 우물=야구팀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우물을 흐리게 하듯 네가 혼자서 온 팀 망친다.
A B R C D R
와 같이 코치는 선수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것은 A·B 두 항과 그 관계 R로 엮어지는 A·B·R이 C·D·R과 등가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A : B = C : D
라는 유추 관계가 형성됨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화자인 코치가 속담 상황 속의 A와 맥락 상황 속의 C, 그리고 마찬가지로 속담 상황 속의 B와 맥락 상황 속의 D를 연관 짓는10) <상관 작용>이 청자인 선수의 심중에서도 작용함으로써 유추 관계는 실효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데, 선수가 코치의 말에 불복하면서 “아닙니다. 모난 돌이 정 맞은 것뿐입니다.”라고 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선수 스스로 자신이 우물 흐르는 미꾸라지에 비유됨을 거부하고 자신을 모난 돌에 비유하고자 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은 그치지 않는다. 선수는 팀 내의 다른 선수는 덜 모가 난 돌로 견주면서 필경 코치를 정에 견주고 있는 셈이 된다.
(모난 돌 : 정 = 선수 : 코치)
라는 유추 관계가 이 속담에서는 활용되고 있다. 모난 돌인 선수는 자신에 가해지는 코치의 질책을 정 맞는 일에 견주면서 코치가 되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우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런데 코치가 가만히 있지 않고 역습을 가하면서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더니.”이라고 내뱉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못난 송아지:엉덩이의 뿔=선수:항변) 과 같은 유추의 등식 관계가 코치의 말에서 추출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속담의 거래는 코치와 선수가 서로 사이에 야기된 갈등을 각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혹은 자신의 입지가 보강되도록 풀어 가려고 하는11) <책략>(Strategy)의 실행 과정 바로 그 자체다. 속담이 관련된 상황을 조처해 나가는 계획이나 의도를 여기서 속담의 책략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바로 부분적으로 적용될 명제이기는 하지만, 탈법성이 강한 속담일수록 그 자체 텍스트에서 내재적으로 비유법을 구성 원리 내지 코드로 삼고 동시에 그 균형의 법칙 내에서 유추의 원리를 작동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담은 이 같은 내재적 비유법 내지 유추의 원리와 함께 그 맥락 상황 내에서 또 다른 비유법 및 유추의 원리를 발휘한다. 속담의 비유법 및 유추의 원리는 내적 외적 두 차원에 걸쳐 작용하고 또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맥락 상황에서 발휘되는 속담의 의미 작용은 <轉移의 유추 작용>이라고 규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속담 내의 사물에 관한 명사 및 그 행위 또는 속성을 일컫고 있는 서술어가 맥락 상황의 다른 사물(사람) 및 서술어로 전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 사물의 구체적 행위가 또 다른 구체적 사물(사람)의 구체적 행위에로 옮겨지는 것이 곧 그 의미 작용이다. 이것을 지시물(referent)의 전이에 의한 의미 작용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앞에 들어 보인 바와 같은, 선수와 코치 사이에서 주고받아진 세 가지 속담의 의미 작용은 <전이의 유추 작용>에 관한 전형적인 보기라고 할 만한 것들이다.
  가령,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에서

자라 : 솥뚜껑 = : 새끼줄
밤도둑 : 밤길 가는 사람
벼락 소리 : 자동차 경적
와 같은 다양한 <전이의 유추 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같이 속담이 집행하는 <전이의 유추 작용>은 속담이 사물과 세계를 조직하는 <그물의 코>와 같은 구실을 다하고 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의 속담은 세계와 사물을 향해서 다양하게 열려 있는 것이다. 그로써 속담은 이미 있는 세계와 사물들 사이에서 새로운 유대가 움터서 자리 잡게 하는 <로고스> 구실을 다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전이의 유추 작용>이 관련된 한, 속담의 의미 작용은 큰 제한 없이 개방되어 있는 셈이다. 이것이 속담의 의미론적인 탄력성이다. 그것에 대해서 속담은 넓으나 넓은 <전이의 망(網)>을 형성하고 세계와 사물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같은 <전이의 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심층에는 일정한 추상적 관념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속담의 추상적 의미라고 부른다면, 앞에 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의 경우, “무엇엔가 진짜로 놀란 사람은 그 비슷한 별 것 아닌 것(놀랄게 못 되는 것) 보고도 공연히 놀란다.”와 같은 추상적 의미 작용을 추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속담의 <지시 관념>(reference)12) 이라고 불러서 속담의 구체적 지시물(referent)과는 구별코자 한다.   가령, “개 발에 편자”라면

개발 : 편자 = 상놈 : 감투
거지 : 도포
땀 흘려 일하는 사람 : 비단 옷
보리밥 : 고기 반찬
서툰 목수 : 일류 연장

등 다양한 전이의 밑층에 “보잘것없는 것의 훌륭한 치장” 또는 “당치 않는 결합(짝)”이라고 지시 관념이 있음을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속담의 의미 작용에서 지시물 차원에 걸친 <전의의 유추 작용>과 지시 관념 차원에 걸친 해석이란 두 가지 상보적인 국면에 각별히 유념하고 싶다. 이 두 가지 의미의 차원은 속담으로 하여금 기성 형식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변이를 파생케 할 것이다. 이들 변이는 낱말의 대치(La Substitution), 생략, 첨가, 도치(어순의), (낱말) 결합의 변화 등에 의해 다양하게 생겨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3) 그런 뜻에서 속담은 다른 민간 구술 전승의 장르 못지 않게 강한 양식의 안정성과 동시에 강한 불안정성(변인성)을 함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도 내재적인 양식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은 독자적인 변별적 징후를 십분 갖추고 있으면서 보다 더 큰 맥락 속에 편입되는 자유로운 떠돌이성을 갖추고 있기도 한 것이다.


Ⅲ. 속담과 敍事體

  속담은 원칙적으로 單文이지만, 더러는 그보다 더 작은 語句 또는 單一 낱말일 수도 있다. 또한 <對話장르>로서 <民衆의 判斷>내지 <民衆의 宣言>을 담은 單文이다. 敎訓的이고 倫理的인 社會 規範의 文 이다.
  이 같은 俗談의 屬性은 俗談을 두고 敍書體論(narratology)을 제기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속담이 연행되는 상황 속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여러 가지 기능을 도맡은 처지에 입각해서 상호 주고받는 작용으로 양자 사이의 당면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전략 그 자체 또는 전략의 일환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俗談의 敍事體論>을 제기하는 것이 끝내 난감해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설득자와 피설득자, 또는 논쟁의 승패를 주고받을 사람 등으로 속담의 화자와 청자가 그 기능을 맡고 나설 때, 속담의 맥락적 상황은 이미 <敍事體>일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그리고 그 맥락의 순차적(시간적) 진행이 갈등에서 해결로 지향하면서 나아갈 때, 그 진행 전부가 속담을 갈등의 절정 또는 대단원부에 자리 잡게 한 <스토리·라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크게는 <말싸움> 또는 <말다툼>이란 서사적 사건 속에서 속담의 서사적 기능은 매우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토리·라인이 속담을 돕거나 아니면 역으로 속담이 스토리·라인을 돕는 국면도 속담의 연행 현장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속담에 아예 서사체가 수반되어 있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속담의 발생 동기에 관한 설명 설화 또는 속담의 권위를 다짐하는 설화를 민간 전승에서 찾아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경남 고성 지역에는 “야시(여우)뒤웅박 쓰듯이……”라는 속담이 쓰이고 있다. 이 문장은 물론, “뒤웅박 쓴 야시” 또는 “야시가 뒤웅박을 썼나” 등 변이형(變異形)을 수반하고 있다.
  어느 속담이나 다 그렇듯이 쓰임새 및 기능이며 의미가 다양한 이 관용적인 말은 비아냥거리거나 조소(嘲笑)적이라서 <민속적인 시니시즘>과 무관할 수 없다. 즉, 이 속담은 이른바 <검정빛 해학>으로서 <민속적 비판> 기능을 일상적 회화에서 담당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시 머금은 익살>로서 더러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경지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그 적절한 지시적 기능, 곧 상황이나 사실에 대한 적절한 지적은 당연히 적절한 인지(認知) 기능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회화에 윤기를 더해 주는 익살의 <윤색 기능>을 수반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어느 종류의 속담은 이른바 욕 또는 욕설과 한 묶음으로 <대화 장르>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새 뒤집혀 날아가는 소리”라든가 아니면 “장가도 못 가고 대롱에 × 박을 놈” 혹은 “벼락 맞을 놈” 등은 욕으로 쓰이는 속담이라고까지 보아도 크게 잘못될 것 같지는 않다. “뒤웅박 쓴 여우”가 우화(寓話)적인 발상을 안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누구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여우가 의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속담에는 그 발생에 관한 우화적인 얘기 곧 <히스토리아>가 수반되어 있다. 이 속담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통하기도 하지만, 그 <히스토리아>가 의미 전달을 더 한층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속담이 <히스토리아>를 더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잖은 수효의 속담이 그럴듯한 기원 전승을 수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여우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히스토리아>가 수반되어 있다.

  여우는 새 무덤을 곧잘 파서 시신을 뜯어먹는다.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새 무덤 봉분 안에다 뒤웅박(작은 구멍만 하나 뚫어 놓은 큰 바가지)을 묻어 둔다. 그 뒤웅박은 구멍이 무덤을 파 헤집으면서 들이닥칠 여우 머리 쪽을 향하고 있기 마련이다. 봉분을 어렵지 않게 파헤치던 여우는 퀭하니 이미 뚫려 있는 구멍에다 머리를 디민다. 뾰족한 주둥이로 해서 머리를 쉽게 디밀기는 했지만 이내 목 뒤쯤에 걸려서 죄어들고 있는 구멍으로 해서 뒤웅박을 벗어 던지기는 아주 어렵다. 다급해진 여우는 봉분에서 밖으로 나오지만 머리에 씌워진 뒤웅박으로 해서 앞을 못 본다. 도리 없이 방향을 못 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드디어 사람에게 잡히고 만다. 이것이 “뒤웅박 쓴 여우”란 속담이 생겨난 전말이다.
  그러나 속담이 서사체론이 굳이 그 <히스토리아>와 관련시켜서만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는 속담이 속신과 마찬가지로 한 편의 서사체의 어느 부분에 삽입되어서 기능을 다하는 국면에 초점을 맞춘 서사체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작중 인물의 대화 속에서 활용되는 경우, 아니면 줄거리 전개를 위한 계기의 하나로 활용되는 경우 등을 가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한 속담의 서사체론으로는 한 편의 속담이 그 자체로 또는 내재적으로 서사체를 갖추고 있는 국면에 초점을 맞춘 <내재적 서사체론>과 이 같은 속담의 내재적 서사체가 한 편의 설화나 소설 등, 본격적인 다른 얘기 줄거리가 긴 서사체를 위한 씨앗 구실을 다하고 있는 국면에 초점을 맞춘 <발생적 서사체론>이 있을 수 있다. 이 둘은 따로따로 또는 서로 상보해서 논란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속신의 경우라면 “까치 소리”(김동리), “학마을 사람들”(이범선), “증묘(蒸猫)”(김문수) 등을 보기로 들어서 한 편의 속신이 작품 전체 파블라 내지 스토리가 단일한 문장으로 축약된 <단순 형식>그 자체임을 지적함으로써 속신을 대상으로 삼아서 소설을 위한 <발생적 서사체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속신이 단일 문장으로서 갖는 통사론적 구성이 <인과론>을 발판으로 삼고 있음을 흔하게 목격한다. 가령, <저녁 까마귀가 울면 초상이 난다.>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속신이지만 원인은 까마귀 울음에서 결과인 초상이 빚어지는 과정을 그 문장 속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인과론적이고도 계기적인 사태의 진전이 이 속신으로 하여금, 이미 서사적인 <단순 형식>이 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 이 예언적인 속신을 두고 그 적중과 회피 사이의 갈등이 전개된다면, 쉽사리 “까치 소리”(김동리)와 같은 속설의 발생이 예견될 수 있거니와 이때 한 속신은 한 편의 소설을 위한 발생론적인 단순 형식이면서 동시에 구조적인 단순 형식 구실을 다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속담 또한 이 속신에 관한 명제에서 유추될 서사성을 그 자체의 몫으로 확신하고 있을 것이 예상될 수 있거니와 그것은 속신이 속담과 중첩되어 있는 사례에서도 유추하게 된다. 가령, “말 많은 집은 장맛이 쓰게 변한다.”라는 것은 속신이지만, 그 이유는 이것이 예언으로서 기능하고 사람들은 그 예언의 회피를 그들 행동의 지표로 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주술적인 행동을 유발하거나 통어하는 예언이 속신이란 점을 이때 고려해야 하지만 이 속신에서 가능한 변이형인 “말 많은 집에는 장맛이 쓰다”는 말은 속담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소지를 갖추고 있다. 비유적인 교훈으로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신의 경우처럼 속담 또한 그 자체의 통사 속에 서사성을 간직할 수 있다.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오른다.” 이에는 분명히 상황의 연속적인 변화가 있다. 극적이라고 불러도 크게 과장될 것이 없는 “反語的 轉換”이 주어부와 술어부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反轉의 變化” 또는 “逆의 전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변화가 한 문장 안에서 力動하고 있다. 이 反轉의 機制가 강조될 수 있는 한, 이 속담을 서사체(敍事體, Narrative)라고 부를 것을 망설일 것은 없다. 그것은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의 경우에서 마찬가지로 지적될 수 있거니와 두 俗談 敍事體의 主動者(hero-character/actant)가 고양이인 것은 우연이 아닐 듯하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에서 반전의 변화는 더더욱 극적이다. 고양이가 밤눈이 어두울 턱이 없다는 것은 천하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아니, 되려 밤눈 밝은 동물, 적어도 사람 둘레의 동물 가운데서 으뜸으로 밤눈 밝은 동물이 곧 고양이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보통 고양이도 이미 밤눈 밝음의 긍정적 징표로 특정 지워져 있는데, 하물며 약은 고양이를 두고는 다시 더 무엇을 말하랴……. “고양이+약음”이면 긍정적 징표에 의한 특징지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약은 고양이는 더욱 밤눈이 밝아야 한다.”는 명제가 도출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고양이에게 있어서, 약음과 밤눈 밝음은 동일한 묶음에 속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고양이의 고양이다운 속성을 말하는 문장의 경우, 어느 쪽이나 상호 선택이 가능한 패러다임으로서 그 서술부에 종속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속담에서 동일 패러다임 속의 두 항은 역으로 서로 갈라서 있거나 아니면 서로 등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이 속담이 왜 아이러니(反語)적인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역설이나 반어는 워낙 동일 서술부에 배정될 패러다임의 구성소들 사이에 반목의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패러다임과 <안티 패러다임>으로 갈라서는 문장 내지 명제라고 규정지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 같은 意味論的인 反語는 동시에 劇的인 反語를 兼하기도 한다는 뜻에서 고양이에 관한 두 속담은 다 같이 敍事體, 그것도 單一 文章으로 이룩된 <極小 敍事體>라고 규정될 만한 것이다. 그것은 <豫想/失調> 또는 <期待 /背逆> 등으로 요약 표시될 수 있는 兩分的 對立을 보이고 있는 敍事素(narrateure)끼리의 連接 構造 (Syntagmatic Structure)라고 규점지워질 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시각을 활용한다면 원인 내지 단서 상황에서 예기(기대)와는 다른 부정적 결과가 빚어진다는 뜻에서 <否定의 因果> 또는 <否定의 예기>가 빚어지는 極小 敍事體가 다름아닌 두 가지 고양이에 관한 속담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否定의 因果> 또는 <否定의 예기>를 속담 그 자체의 連接 構造上의 특징으로 치부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들 속담의 비유적 주제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것>, <원인 다르고 결과 다른 것>, <예상 다르고 결과 다른 것>에 걸려 있게 된다. 이와 비슷한 보기의 속담으로는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 또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등을 들 수 있거니와 이들 두 가지 고양이에 관한 속담을 각기 ”여우가 제 꾀에 속는다.” 및 “얌전한 색시 밑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라는 속담과 상호 교환될 수 있음이 드러나고 더불어서 이들 여러 속담 사이에 <텍스트 상호성>이 있음도 드러나게 된다.
  동일한 비유적 주제를 나누어 갖고 있는 속담끼리가 동일 범주에 속할 것이므로, 고양이와 여우 그리고 여성이 또한 동일한 범주에 묶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 여성, 특히 전통적 여성의 <젠더>(gender) 곧 <文化 社會的 性>이 고양이 및 여우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듯, 이들 두 동물의 文化 社會的 性 역시 女性임에 대해 말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속담이 총체적으로 사물 및 현상의 <민속적 범주화> 내지 <민속적 분류론>을 바탕에 깔고 형성되어 있음이라고 말하게 해 준다. 한 공동체가 용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 체계, 합법성, 윤리성, 혹은 규범성 등을 정립할 수 있는 체계 안에서 사물과 인간 행위며 사회 현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이 속담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속담은 이미 세워져 있는 사회 체계의 옹호자라는 사회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지만, 이를 바꾸어 말해서 속담의 전통성 또는 보수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 또는 <원인 다르고 결과 다른 것> 아니면 <단서 다르고 결과 다른 것> 등을 추상적인 관념상의 주제로 삼고 있는 속담들은 한 행위 주체(行爲 主體)가 야기하는 사태의 변화, 상태의 변화에 관심을 쏟아 붓고 있다고 보여진다. 예기나 예상을 뒤엎고 일어나는 뜻밖의 변화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 해서, 이들 속담은 그 자체로 극미 서사체(極微 敍事體)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태 변화를 주축 줄거리로 삼고 있는 길이가 긴 서사체의 발생 동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겉 다르고 속 다른 인물이 일으키는 <단서 다르고 결과 다른 사건>은 해학성과 풍자성을 겸한 설화나 소설들, 혹은 이들 작품과 유사한 교훈성 강한 설화나 소설들의 심층적인 <단순 형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극히 축약된 <파블라>의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앞뒤의 불연속성, 앞뒤의 모순 그리고 예기의 허물어뜨림 등은 해학이나 풍자의 중요 원천이지만 이들은 <도착의 속담>14) (Perverted Proverb)에서도 접하게 되지만, 한국의 민간 전승 가운데, 탈춤 이외에 승려, 양반, 중, 위선적인 인물을 다른 설화에서도 접하게 된다. 이럴 경우 이들 설화를 <도착(倒錯)의 설화>라고 부름으로 해서, <길어진 도착의 속담>으로 간주할 만한가 하면, 역으로 <도착의 속담>을 <줄여진 도착의 설화>로 간주할 만한 것이다. 이 경우, 줄여진 도착의 속담에서 해학에 따라 붙여 있기 마련인 이른바 <펀치 라인>을 지적할 수 있고 동시에 <길어진 도착의 속담>에서도 <펀치라인>15) 을 지적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