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의 속담】

속담에 대한 국어학적인 재인식 시도

김하수 / 연세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속담 연구로 가는 징검다리

  자신의 모국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속담’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속담에 대한 여러 가지의 경험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속담이 국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어학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학문 세계가 주는 삶의 의미와 일상적인 삶의 의미가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속담에 대하여 이른바 학문적으로 접근하며 쓰였다는 글들의 경향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속담이 가진 정서적 아름다움, 전통적인 지혜와 재치, 풍요로운 표현법 등을 언급하는 부류이다. 이 같은 부류의 글은 속담에 대한 미학적인 가치를 발견하여 그 의미를 주관적으로나마 재해석해 주는 기여는 높이 살 만하지만, 사실 국어학으로의 통로를 찾아 내는 ‘이론 축적’은 성취하지 못하고 있거나 이미 단념하고 있는 상태이다.
  두 번째의 부류로는 속담에 대한 문헌적 이해를 중요시하는 흐름이다. 속담에 대한 역사적인 천착, 유사 개념에 대한 정리, 속담 분류, 그리고 속담에 대한 몇몇 저술의 소개 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아쉽게도 이 흐름에서도 속담에 대한 충분한 이론 축적에는 성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속담을 다룬 몇몇 논문이나 속담 모음의 서론 부분을 현학적으로 장식해 주고 있을 뿐이다.
  세 번째로 눈에 뜨이는 것은 속담의 형태적 분류 또는 의미론적 분류에 관심을 보이는 글들이다. 엄격히 생각하면 바로 이러한 시각부터 속담에 대한 국어학적인 인식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서도 속담에 대해 접근하기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전형적인 국어학에 입각한 방법론이 가지는 근본적인 이론의 한계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속담이 가지는 독특한 언어학적 성격이 쉽사리 형태론적 요소로 분해되거나 통사론적 구성으로 구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구조주의적인 시각에 기울어진 그러한 분석법으로는 역시 형식 분류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다른 면에서, 의미론적인 분류에 다가설 경우에도 구조적 의미보다 오히려 수사적 의미에 만족하거나 자칫 민속학적인 의미 분류로 대체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속담 연구는 대단히 거칠게 짜맞추어진 유형론(taxonomy)에 머무르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손꼽히는 것은 자료 수집과 뜻풀이의 수준에서 되도록 광범위하게 고금의 속담들을 정리한 업적들이다. 그 자체를 일종의 학문적 성과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우리의 속담 연구에서 가장 솔직한 현주소인 동시에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 부문이다. 수집의 방대함에서는 이기문(1981), 용례 중심으로는 정종진(1993)의 작업이 이 부분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업이고, 또 쉽게 손이 가지 않는 부분에 손을 댄 송재선(1993)의 기여는 치하 받을 만하다. 그리고 북한과 연변 자치주에서 이룩한 성과도 그 착실함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1)
  그러나 남은 문제는 이렇게 방대하게 쌓인 자료를 어떻게 학술적인 성과로 진전시키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속담을 음운론적으로, 형태론적으로, 그리고 통사론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그 분석 결과를 하나의 언어학적 산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적잖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 그러한 작업에 관심을 가진 분석가들의 고민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국어학’과 ‘속담’이라는 두 개념을 함께 논의하기 위하여 숙고해야 할 대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방법론 이전에 “언어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지금까지 언어의 모든 것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여긴 시각에 대한서 반성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언어를 ‘분석’의 대상으로만 판단해 온 국어학의 밑 흐름의 시각을 전제로 한다면 사실 속담에 대한 학문적 인식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속담은 그 형태적인 구성 요소들로 쪼개지는 순간 이미 속담으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속담은 하나의 덩어리로서만이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덩어리’는 언어학적으로 전형적인 구조 분석과 체계적인 도식화가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덩어리는 기본적으로 언어적 요소(더 엄격히 말하자면 형태론적인 요소)가 가지는 의미와 기능보다는 함께 뭉쳐서 실제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관용 어구, 성구, 연어 등의 여러 개념으로 일컬어지던 일련의 언어 연속체에 대한 이해와 재인식이 없이는 한 걸음도 발을 떼어 놓기 어려운 것이 바로 속담 연구라는 영역의 특성이다. 언어를 민속, 역사, 심리, 그리고 정신 등의 산물로 미분화된 채로 인식하던 전근대에서, 체계로서의 언어를 분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현대 언어학이 또 다시 위에서 말한 여러 요소가 뒤섞인 덩어리를 놓고 고민하게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속담에 대한 이해는 속담이라는 언어적 표현 범주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학 자체에 대한 재인식이 전제되지 않고는 다시 앞에서 말한 어수선한 속담 연구로 우회해 가지 않을 수 없는 굴절된 길이 뻔히 내다보이기만 할 뿐이다. 결국 속담을 정확하게 재인식하기 위해서는 공시와 통시, 전체와 부분, 언어 내적인 것과 언어 외적인 것 등을 나누는 소쉬르적인 이분법의 극복을 위한 분석에 우선하는 통합적 시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방법론적인 고려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의 남은 길, 그것은 속담을 언어적 현상으로 파악하게 하는 ‘언어와 관련된 제반 문젯거리들’을 함께 점검해 보는 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추종해 온 단어와 문장이라는 분석의 기본 단위를 극복하는 장치로, 언어와 인간의 행위가 어떤 상호 운동을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재출발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 입말의 성격과 발전의 모습

  말의 본질적인 기능은 하루하루의 삶에서부터 작동하고 있다.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없는 명제를 이렇게 앞머리에 두는 이유는 이 기본적인 시각에서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발걸음을 떼어 놓을 것인가가 국어학이 속담에 대한 재인식에 예정대로 닿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말은 본래 문법 구조에서 탄생한 제품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욕구에서 비롯된 생산물이다. 공동체적인 삶의 욕구란, 사회라는 조직체에서 함께 생존해야 하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생기는 의문, 해답, 반론, 동조, 회의, 요구, 거부 등의 무수한 상호 행위(interactions)를 서로 엮어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 무수한 행위들이 각각 음성에 기초한 형태로 유연화(有椽化, motivated)되면서 이 결과물인 언어는 자신의 독자적인 모습을 가꾸어 나아가게 되었다. 곧 언어화(verbalization)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행위는 언어 행위(speech act)로 실현된다. 모든 언어 행위는 자체의 목표와 실현 방식, 그리고 그 성취 여부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인 행위 양식이 가지 쳐 나간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의 특이한 담화 전략(discourse strategy)이 구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들을 달고 사람들은 언어를 통하여 의사, 감정, 소망 들을 표현한다. 오로지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특히 상황적 조건(situational conditions)를 통하여 언어화를 수행한다. 이 단계에서의 언어는 철저하게 상황 의존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입말(口語, spoken language)이라고 한다.
  상황 의존적인 언어는 당연히 언어 외적인 요인의 영향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언어 외적인 것으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황에 유착된 조건 속에서 더욱 풍부한 감성적인 내용을 여러 가지로 담을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특정한 상대자와의 인간관계와도 연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까운 벗에게 “또 그거?”라고 하며 빙긋이 웃었을 때에 그 말의 의미는 두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 된다. 곧 서로 함께 하는 ‘공동 경험의 세계’라는 전제 없이는 이것이 가지는 특수한 의사소통적인 성격(communicativeness)을 인식해 낼 수 없다. 이러한 언어 현상은 이른바 화용론(pragmatitcs)의 중심적인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상황 의존적인 입말은 일정한 기능의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특정한 상황과의 유대를 끊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필요한 광범위한 사회 구조의 출현 때문이다. 곧 상황에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기능이 필요해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근거하여 입말은 상황에서 비교적 자주적(autonomous)인 언어-경우에 따라 상황으로부터 고립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언어-로 정교화(elaboration)된다. 이렇게 정교화된 또는 정교화되어 가고 있는 상태의 언어를 글말(문어, writen language)이라고 한다. 정교화된 글말일수록 문장 내적인 통일성이 강하게 드러나며, 이러한 통일성 있는 구조는 통사론적 접근이 수월한 ‘문법적 범주’들을 머금은, ‘언어학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일차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정교화 과정에서 각 언어 요소들의 미시적 기능이 강화되고, 이 미시적 기능은 서로의 문법적 관계를 훨씬 명시화한다. 언어 의식 또한 정교화되면서 어절, 단어, 형태소 들은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통사 구조’로 형성된다.
  한편 상황 의존적인 입말은 언어 외적인 요소와의 어우러짐 속에서 글말과는 다른 영역에서 다른 기능을 나누어 갖는다. 사사로운 관계, 가정이나 이웃 관계 같은 소단위의 일상생활 등은 입말이 살아 숨쉬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그리고 언어의 숱한 변화와 변동이 일어나는 터전이며 각종 변종(variation)들이 끊임없이 생성, 발전, 소멸하는 소굴이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입말은 문장 내적인 통일성이 그리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통사적으로 불완전한 문장도 자주 생산되고, 언어 요소가 아닌 표정이나 손짓이 그 기능을 대리하는 일도 잦다. 언어의 영역과 언어 이전 상태의(paralinguistic) 의사소통 수단이 혼재하고 있는 셈이다. 각종 시늉말이 매우 자유롭게 사용되고, 새로 만들어진다. 글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간투사(interjection)의 증가와 화용론적 기능의 광범위함은 괄목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상황 의존성 때문에 나타나는 ‘뜻 바램(Verblassen)’은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곧 각 형태소들이나 어휘가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던 의미 요소는 전체 발화 단위가 상황적 요소와 더불어 나타내는 전체적 의미(혹은 문맥 의미, contextual meaning) 속에서 희미하게 바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법론에서 말하는 말줄임(contraction)에 대한 화용론적인 논거가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입말의 테두리 안에서는 줄여진(음운론이나 형태론에서 ‘탈락’ 또는 ‘축약’되었다고 하는) 요소가 담당해야 할 의미는 일단 문맥이나 상황 요소가 대용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언어 요소들 사이, 또 언어 요소와 언어 외적 요소 사이의 결합성이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지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맥이나 상황 요소가 담당했던 의미 부분이, 줄여진 형태에 규칙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하면 일정하게 재형성된(창조된) 의미를 담은 형태적 요소가 창조된다. 쉬판(T.Schippan)은 이런 것을 재유연화(Remotivisierung)라고 하였다.2) 이러한 재유연화는 정교화된 글말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말의 입말에서 흔히 나타나는 ‘-을걸’이나 ‘을거야’ 등은 이러한 재유연화 과정에 있으면서 의미 분화를 일으키고 있는 도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어휘 요소의 문법화(grammaticalization) 과정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입말이 가지는 상황 의존성과 언어 요소의 통합이라는 특징은 특정한 상황이 특정한 표현과 인습적으로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현상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인사를 나누는 말, 경고나 협박을 하는 말 등처럼 ‘전형적인 상황’에는 ‘전형적인 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투적인 말(conversational routines)이라고 한다. 변형 생성 문법의 서장을 이루는 언어 인식에는 ‘사람은 한 번 들은 말을 외워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창의적으로 한다’고 하는 명제가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의 언어의 상당한 부분은(특히 입말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자주 되풀이되는 말’ 또는 ‘으레 쓰이는 말’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인식이다. 물론 글말에서는 이 상투성이 다양한 비유법이나 수사적인 강조를 통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극복된다. 굳어진 상투 어구는 여러 면에서 그 효용이 높다. 통사적으로 결합된 낱낱의 어휘 의미를 불충분하게 알고 있어도 전체적인 쓰임새가 합목적적이면 아무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화용적으로 함축된 의미와 가치를 발화 상황에 조화시키면서 얼마든지 재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사용적 시각 말고도 화용론적인 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각 사회 집단의 ‘공동의 앎’를 언어적인 ‘완제품(ready-made)’ 형식으로 간직하면서 통용의 범위를 넓혀 간다는 점이다. 이 언어적 완제품은 매우 일반적인 앎을 나타내는 형식부터 시작하여 특수한 앎을 보여 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단계적 변화를 보여 준다. 또한 그에 따라 그 굳어짐의 정도에도 일정한 단계적 차이가 보인다.


3. 굳어진 상투 어구

  이와 같이 일정한 상투적인 말은 담화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공간적인’ 사용 범위가 상대적으로 넓어지고 또한 여러 번 비슷한 상황에서 되풀이되는 ‘시간적인’ 확대가 일어난다. 이리하여 극히 좁은 범위의 상황에서 몇몇 사람들이 인습에 따라 한때 사용하는 상투 어구에서부터 상대적으로 큰 집단이 장구하게 사용하는 상투 어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문화적인 함의가 다른 어구가 형성된다. 이러한 상투 어구는 필연적으로 자꾸 ‘되풀이되어’ 사용 빈도가 높아지고, 그 빈도가 높아질수록 사용된 표현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늘상 함께 나타나다시피 하는 어구들이다.

(1) ① 앞으로 많이 부탁드립니다.
②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③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④ 어린이와 노약자를 보호합시다.
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평생 해로하기를 바랍니다.
⑥ 흡연은 폐암 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러나 위의 보기 (1)은 아직 그 성격이 상투 어구로서는 약간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개 일정한 상황이나 조건에서는 그 결합도도 높고, 상투적 성격도 강하지만,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늘 유용하게 그 기능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즉 우리 사회의 공적인 부문의 일부에서는 유용하거나 빈번히 쓰임에 반하여 일상 세계의 사적인 부문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지 어휘 결합의 강도는 비교적 굳어져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상투 어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의례적인(ritual) 어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상투 어구가 특정한 종류의 상황과 연루되어 얼마나 폭넓게,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자들에게 ‘되풀이되어’ 애용되느냐에 따라 그 상투성의 강약이 생긴다. 상투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어구에 동원된 어휘의 결합은 단단해지게 마련이고, 반면에 약하면 약할수록 그 어구는 매우 자유로운 결합을 하게 될 것이다. 대개 개별적인 상황에 가까울수록 그 어구가 굳어진 정도는 약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들이 되풀이하여 사용할수록 강한 결합의 상투 어구가 생기며, 그 상투 어구는 사용되는 상황, 사용 목적 등과 밀접한 유대를 가진다는 것이다.
  상투 어구가 둘 이상의 어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으면, 화용적 함축이 어휘 의미보다 더 강한 언어 행위적 힘(illocutionary force)을 갖는다. 그러나 언어 행위적인 힘보다는 문장 구성을 위한 기능이 더 두드러진 상투 어구도 보인다. 대개 사전적으로 관용어에 속하는 것이다. 대개는 특정한 명사구와 동사구가 필수적으로 공기(共起)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상투적인 어구라기보다 문장 구성과 관계되어 굳어진 어구이며 예는 다음과 같다.

(2) 다물다.
감다.
방귀 뀌다.
지저귀다.

  (2)에서 나타난 상투 어구는 기본적으로는 서술어의 어휘 의미적인 특성에서 말미암고 있다. 곧 ‘다물다, 감다, 뀌다, 지저귀다…’ 따위는 특정한 목적어나 주어와 연계를 가지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낱말과의 공기가 불가능하다. 간혹 “콧방귀를 뀌다.”와 같은 표현도 가능하지만 역시 (2)의 ③에서 보여 주는 어휘 체계의 기본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엄밀하게 본다면 (2)에 속한 보기는 상투 어구라고 하기 어렵고 어휘들이 서로 특수화된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옳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어구의 구성이 역사적으로 일정한 상황과의 유착을 통하여 발전해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자칫 지나친 억측에 빠지기 쉽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다음의 (3)이 보여 주는 보기들이다.

(3) ① -에 대하여
② -에도 불구하고
③ -을 무릅쓰고
④ -로 말미암아

  (3)에서 보여 준 보기는 일종의 문법화 현상이다. 곧 문법적 기능화를 위하여 특수화된 것이다. 여기에 등장한 동사들은 통사적인 사용 범위-다시 말해서 일반적이고도 자유스럽게 사용되는 조건-에서 특수한 사용 범위로 그 쓰임새가 특수화되었다. 이러한 특수화를 통하여 복합적인 문장 구성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그 의미도 구체에서 추상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결합 어구는 사실상 언어 대중에게는 그리 복합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단일 어휘의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3)도 이 글에서 논의하려는 상투 어구의 성격에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다음의 (4)와 같이 예가 마치 상투 어구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지식을 담은 명제들의 의미는 상투 어구 비슷하지만 그 문장 구조는 과학적 명제의 차이나 내용의 발전에 따라 매우 자유롭게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논외로 하고자 한다.

(4) ①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② 윤년은 평년보다 하루가 더 많다.
③ 한국어와 영어는 그 계통이 다르다.

  굳어진 상투 어구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음에 예시한 (5)에서부터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5)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배가 터지게 먹었다.
호랑이 선생님
뺑소니 운전자
얼씨구 하며 기뻐한다.

  (5)에서 제시된 것은 일정한 상황과 일정한 언어 표현 형식이 유착되면서 일어난 전형적인 상투 어구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굳어진 수사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의 예문들은 다음의 (6)과 같이 선행하는 일차적 담화를 전제하지 않고 단지 어휘 의미론적인 구성만 가지고 이해할 수는 없다. 선행하는 일차적 담화가 있다는 것은 사용자들 사이에 과거부터 축적되어 온 공동의 경험이 있다는 증거이다. 이 공동의 경험이 바로 상황과 언어 행위가 유착되어 일련의 언어 형식을 굳어지게 만든 원동력이라 하겠다.

(6) ① 사람을 한참 기다리면서 한 방향만 보고 있으면 꼭 눈이 빠질 것 같다.
② 음식을 많이 먹으면 꼭 배가 터질 것처럼 부르다.
③ 학생들에게 엄격하고, 심하면 때리는 교사들의 별명은 으레 ‘호랑이’이다.
④ 사고를 낸 운전자들 중에는 책임을 피하려고 그냥 도망치는 경우가 있다.
⑤ 아주 좋은 일이 생기면 ‘얼씨구’ 하면서 기쁨을 나타낸다.

  결국 (5)와 같은 종류의 표현에 등장하는 상투 어구들은 첫째로 일련의 어휘가 항상 묶여 있으면서도 그 어휘 의미나 통사 의미에 구속되지 않는 특정한 언어 행위를 보이는 기능을 하고 있고, 둘째로 그것에 전제가 되는 담화를 이해하지 않고 사용하기 어려우며, 셋째로 서로 상관되는 사회적 담화 전체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사회적,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개별 어휘나 문법적 규칙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특성을 갖는다.3) 이러한 특성들이 서로 결합 정도를 강화하면서 하나의 단일한 문장 구성을 갖추게 되면 이제는 상투 어구는 어절이나 절의 범위를 넘어서서 완결된 통사 체계를 갖춘 형식을 보여 주기도 한다.


4. 앎의 수단으로서의 굳어진 상투 어구

  전형적인 상황에서 전형적인 말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선 상황과 말의 긴밀함을 보여 주면서도 또한 사물을 보는 유사한 인식 방법, 달리 말해서 특정 대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앎’이 유사해지기도 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대개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경험을 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동일한 앎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작은 소집단 또는 좁은 범위의 지역 사회 등에서는 이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이 일상적인 언어 행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해 주고 있다. 그렇게 ‘함께 하는 앎’을 지녔기 때문에 그러한 집단에서는 상투 어구가 빈번하게 쓰이고 있으며 그러한 표현에 대한 의구심이나 반대를 나타내는 어구(곧 반대 담화)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간혹 어떤 반대 담화가 나타나면 대화에 상당한 혼선을 빚거나 대꾸조차 안 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만일 반대 담화가 기존의 지배 담화의 상투성을 파괴하는 데에 성공하면 그 반대 담화나 새로 형성된 대안적 담화는 새로운 지배 담화로서 새로운 상투 어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하여 같은 앎에서 비롯된 가치관을 똑같이 표현하려는 가치 집단이 끊임없이 형성된다. 결국 상투 어구는 함께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함께 알고, 공동의 가치를 지니는 집단의 (역사적인) 생산물이다.
  사사로운 언어 사용의 영역에서는 ‘아무개는 화를 잘 낸다.’라든지 ‘어느어느 집의 음식이 아주 맛있다.’ 하는 식의 공통의 인식이 서로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앎’으로 공유되고 있으며, 이것이 일정한 상투적인 표현을 굳어지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의 앎은 상투 어구가 생산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담화를 일차적인 것으로 삼아 다음 단계에서는 “아무개처럼 화를 잘 낸다.”든지 “아무개와 자주 만나더니 성질만 급해진다.”는 식의 이차적인 담화가 생성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어느 집 음식 못지 않다.”라든지 “어느어느 집 솜씨 따라 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등의 이차적인 담화도 가능하다. 일차적인 담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러한 이차적 담화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공동의 앎이 상투 어구에 유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오면 땅이 질다.”라는 표현이 보여 주는 앎의 대상은 극히 일반적인 현상의 일부분이다. “끓는 물은 위험하다.”든지 “커피는 쓰고, 설탕은 달다.”라는 말이 전달하는 앎은 사실상 누구든지 기본적인 삶의 체험에서 배워 들인 것이다. 대개 이런 전달하는 앎은 굳이 언어화되지 않는다. 언어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모름’의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앎은 기본적인 경험을 통하여 체득되었기 때문에4) 그러한 일차적 담화보다는 이차적 담화의 사용이 더 흔하다. 곧 “비가 왔으니까 장화 신어라.”라든지, “그거 끓인 물이야. 조심해!” 또는 “설탕이 떨어져서 커피를 못 마시겠는데.”라는 이차적 담화가 일반적으로 먼저 언어화됨으로써 일차적인 담화는 인식과 행위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도 삶의 유지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따라서 이렇게 일반적인 현상에 대한 당연한 앎을 담아 주는 어구는 그야말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등장하지도 않고, 그 문장 구조가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져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일정화된 앎(이른바 상식)를 넘어서서 일정한 증거 제시가 필요한 앎은 적지 않은 복잡성을 띄게 된다. “이 물은 생수이다.”라는 말은 그것이 진정 생수인지 그리고 정말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더 나아가서는 생수란 과연 무엇인지 등과 연관된 복잡한 앎의 문제를 동반한다. 이러한 영역의 담화는 각각의 개별 어휘가 가지고 있는 어휘 의미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화용적 의미의 특수성들을 바탕으로 대단히 복합적인 형식의 언어화가 가능하다. 곧 통사 현상과 화용 기능이 얽히고 설키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의 논증에 대한 반대 논증도 활발하다.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하나의 담화로서의 어구와 반대 담화로서의 어구가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흔하다. 곧 “핵 발전소는 위험하다.”와 “핵 발전소는 안전하다.”라는 어구가 서로 이율배반적이나 공존하면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 관심사 등의 가치 충돌을 나타내고 각각의 어구를 어떻게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어구가 생산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아직 덜 굳어진- 담화로 존재한다. 그러나 특수한 집단(전문 집단 혹은 이해 집단) 내부에서 일치된 담화를 가질 때에는 해당 어구가 굳어진 상태의 모습을 띨 수 있다.
  또 한 단계를 지나서면 사회적으로 ‘일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구, 즉 지배적 담화가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어구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화를 뚜렷하게 보여 주는 어구이다. 그리고 문장으로서 꽤 단단하게 굳어진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담화에 대립하는 반대 담화의 형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어렵다. “대학생이 그것도 몰라?”라는 담화는 한편 단순히 도발적인 것도 같지만 상대방에게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요구를 천명하는 데에 상투적으로 쓰이는 지배적인 담화이다. 또한 이러한 어구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상징하는 구실도 한다. 따라서 이 어구는 다른 담화에서 생산된 어구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어구가 의미적으로나 형태적으로 흔들리거나 반대 담화가 상투화되기 시작하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담화의 전체 성격이 흔들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슨 선험적 조건이나 인습화로 말미암아 굳어진 어구라고 하기보다는 단단하게 빚어 놓아 ‘굳힌’ 어구이다.
  이러한 종류에는 각종 과학적 인식을 대변하는 어구들이 속한다. 단지 얼마나 널리 신뢰 받는 학설을 바탕으로 했느냐에 따라 그 어구의 굳어진 정도에는 차이가 많다. 그 밖에도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훈들도 이와 비슷하게 굳어진 모습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는 말은 이른바 격언으로 꼽히는 알려진 어구이다. 반면에 “남자는 군대를 가 보아야 한다.”라는 어구는 덜 알려졌으며 덜 지배적이고 반대 담화의 제기가 항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덜 굳어져 있다.


5. 계급 문화의 산물로서의 속담

  하나의 공동체가 오랫동안 공동의 삶을 엮어 오는 역정은 그 구성원들의 공동의 행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동의 행위란 늘 우호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내부의 갈등, 불화, 투쟁, 화해 등을 어떻게 해결해 왔으며 어찌하다 해결에 실패를 하였는가 따위를 망라한 공동의 행위, 곧 우호적 행위와 적대적 행위를 모두 얼싸안는 개념으로서의 공동의 행위이다.5)
  모든 공동체는 지배 집단에 의해서는 단일한 성격의 획일적 공동체 의식이 강조된다. 이 공동체 의식은 지난날에는 신화, 영웅, 설화 등이 매개 역할을 담당했고, 그 후에는 종교가 그 역할을 승계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대개의 지배 집단은 ‘민족’이나 ‘국가’를 공동체 의식의 대표적인 매개물로 삼고 있다. 이 매개물은 신화, 영웅, 설화처럼 직접적인 언어 표현물인 이야기의 모습을 띠었고, 그 후에는 신앙이나 이념의 모습으로 중층화(重層化)되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아닌 추상물의 형태를 지녀 왔다. 결국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패권을 강화하는 ‘이야기’를 신화, 영웅 설화, 경전, 정치 이념 등으로 이데올로기화하는 데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공동체 유지에 성공해 온 것이다.
  지배 집단에서 벗어난 구성원들은 크게 보면 하나의 피지배 계급을 형성하고 잘게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소규모의 이익 집단으로 분산되거나 고립된다. 각양각색의 피지배 집단도 자신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앎과 가치를 지키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민담, (노래 형식의) 민요, 전설 등의 형태로 자신들의 집단이 잊어서는 안 될 앎과 가치를 담아 후세에게 물려주었다. 거의 예외 없이 문자화에 이르지 못하고 구전의 형태를 띠었다.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은 서로 앎과 가치의 차이가 있는 만큼 그 이야기의 내용에도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각각 자주 쓰는 상투 어구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동의 상투 어구도 필요했을 것이다. 상투 어구들 가운데 오래 되풀이되어 쓰이는 것은 점점 굳어진 상투 어구가 되어, 그 어구를 구성하는 낱낱의 의미보다 어떤 상황에 어떤 가치나 행위 목적을 드러내는가 하는 언표 내적 행위(illocutionary act)가 그 쓰임새의 핵심이 되었다. 우선 지배 집단의 상투 어구는 풍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적 유래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누구의 가르침, 아무개의 경험 들과 같은 근거가 상대적으로 훨씬 명시적이다. 이른바 고사 성어라고 하는 어구들은 이러한 요건을 매우 잘 갖추고 있다.
  피지배 집단은 상투 어구 역시 빈곤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의 기록이 안 되기 때문에 구전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 유래와 근거도 아리송한 것이 많아서 대개 적당히 해석해 두어야 한다. 행주치마라는 말뜻을 지배 집단의 근거로는 ‘쵸마’라는 세련된 해석을 할 수 있으나 피지배 집단의 아리송한 기억력으로는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라는 믿거나 말거나 할 설명에 그치게 된다. 지배 집단은 일일이 외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매우 명료한 핵심 부분만을 중심으로 하지만, 피지배 집단은 주로 기억력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만들어 붙여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설명은 무척 재미는 있으나 그대로 믿어 주기는 어렵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말뜻을 풀어 가면서는 믿을 것이 별로 없고, 그 내용을 통해 말하려는 총체적인 문맥과 상황의 이해를 통하여서만 수용될 수 있다.
  굳어진 상투 어구 가운데 지배 집단의 의식이 깃든 교훈들은 으레 그것을 처음 말했다는 사람이 거명된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6), 베이컨 그리고 립크네흐트의 “아는 것이 힘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것들은 이렇게 ‘상투적 인용구문’으로 내려왔다. 물론 종종 그 최초의 발설자가 불분명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이들의 말은 거의 지배 집단에서 생산되어 공동체 전체의 가치를 대변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여 왔다. 보기 (7)과 같은 이런 종류의 상투 어구는 격언(格言), 금언(金言) 등처럼 ‘가르침의 말’이라는 고상한 명명을 통하여 사회적 담화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어 왔다. 그러다 보니 “삶이냐 죽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처럼 작품에서 자주 인용되는 어구는 어떤 부류에 들어가야 할지 불분명한 엉거주춤한 성격도 눈에 뜨인다.

(7) 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②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③ 그래도 지구는 돈다.
④ 아는 것이 힘이다.
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반면에 피지배 집단의 상투 어구는 그냥 ‘속된 이야기(俗談)’라는 초라해 보이는 차림새로 구전 문화(oral culture) 속에서 소박하고도 진정 속물스러운 가르침을 전수해 왔다. 우리가 속담이라고 이르는 상투 어구가 무언가 재미있으면서도, 공식적인 언어 행위를 나타내기 곤란한 까닭이 바로 이 통속성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속상함, 짜릿함 등이 알알이 배어 있으면서도 공동체 전체의 가치를 대표하기에는 아직 속물스러움, 소집단성 등이 틈틈이 박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개별 속담 사이에서도 (7), (8)과 같은 이율배반이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기도 한다.

(7) ①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다.
②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8) ① 늙어서 만난 사람이 더 정답다.
② 늙어서 된서방 만난다.

  (7)은 서민 생활에서 필요한 적극성과 좌절이, (8)에서는 곡절 많은 인생에서 겪는 숙명론적인 기대와 체념이 드러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양식이 피지배 집단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치이자 앎이라는 것을 위의 예는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어휘 선택에도 (9)에서 보이듯이 ‘개, 과부, 계집, 도둑, 똥, 먹는 것, 송장, 무식’ 등 대단히 통속적이고도 사실적인 성향이 돋보인다. 이러한 통속성은 피지배 집단의 일상생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자기 분열, 자아 상실, 단순 논리 그리고 자기 혐오와 천박한 이기주의 등이 많이 확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물스러운 가치에도 불구하고 형식주의와 기만적인 교훈 중심의 격언 종류보다 사회 구조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인 앎‘이 섬뜩할 정도로 표출되면서, 그 담화의 내용은 오히려 지배 집단보다 더욱 보편적인 가치를 머금고 있다.

(9) ① 병 주고 약 준다.
② 달린 개가 누운 개 보고 웃는다.
③ 과부 마음은 과부가 안다.
④ 꼬리가 길면 밟힌다.
⑤ 서울 가서 한양 찾는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은 공동체 문화에 대한 기존의 형식주의적 이해이다. 우리가 문화 공동체, 민족 문화권 따위로 일컫는 범주는 단일하고 획일적인 요소로 채색된 집단이 아니라, 위에서 예를 든 격언과 속담이 보여 주듯이 서로 대립적인 집단의 대립적인 의식이 ‘공공의 의사소통망’을 통하여 서로 얽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속담과 격언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집단의 다른 가치와 앎이 사회적으로 분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격언에 비하여 속담은 유난히도 변종이 많다.(보기 10) 표준어보다 방언에서 유난히 변종이 많이 눈에 뜨이는 것과 같은 상관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종 속담은 사실 의미론적으로는 동의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피지배 집단이 분산된 삶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동시에 내적인 의사소통을 통하여 집단 전체의 의지와 꿈을 통일시켜 표출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10) ① 길 닦아 놓으니까 [미친년/각설이 떼/똥개] 먼저 지나간다.
②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꽃이 붉어 보인다.]


6. 속담의 오늘과 내일

  여기서 속담은 오로지 지나간 시대의 산물뿐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 봄 직하다. 속담이 피지배 집단의 문화적 소산이라면 지금도 소외 집단 혹은 대중문화의 주변부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속담이 형성되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물음은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직 속담의 한 가지라고 가리키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유형의 어구가 우리 사회의 뒷전에서 그리고 사사로운 담화의 영역에서 포착되고는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지만 한때 우리 사회에서 제일의 갑부로 알려졌던 이병철 씨의 이름자에 빗대어 “내가 무슨 돈병철 아들인가?” 하는 어구가 유행되기도 하였으나 우리의 경제 구조의 변화로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비교적 생존력이 있는 듯한 신흥 속담류로는 예를 들어 “딸 낳으면 외국 여행하고 아들 낳으면 전방 면회 간다.”와 같은 색다른 어구들이 “딸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 낳으면 고속버스 탄다.” 하는 종류의 변종과 함께 최근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의 간극 또는 격차 가운데 끼어 살고 있는 서민 또는 민중들에게 그들의 애환을 표현하며, 공적 세계에서 강조되는 가치와 자신들의 삶의 현실 사이의 틈바구니를 이해하는 정신적 동조자를 구할 수 있는, 새롭게 굳어진 상투 어구의 필요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회의 지배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위선적 요소를 꼬집는 어구는 사회 계급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많이 애용되고 있다. 속담으로서의 기능이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최근에 유행되었던 토사구팽(兎死狗烹), 복지부동(伏地不動) 또는 복지안동(伏地眼動),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따위 역시 우리 사회의 아픈 점을 매섭게 찔러 주는 독특한 어구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다.
  Burge, H(1973)는 최근 독일 사회의 입말에서 속담 자체가 점점 잘 안 쓰이는 현상을 특정한 어구에 대한 권위를 별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 매체나 정치적인 영역에서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풍토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가 하는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속담의 사용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논의를 근거로 한다면 한 사회의 대화의 기제, 말의 통로가 활발해지고 자유스러워질수록, 달리 말한다면 ‘소외’ 현상이 극복될수록 속담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권에서는 속담이 사회 변혁의 영향으로 진보화되어 나가는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퇴폐적인 속담의 극복, 특히 여성이나 노동 문제에 관한 전향적인 자세 등이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과 함께) 새로운 속담이나 변종의 문제에 늘 강조되고 있다.7) 이러한 자세는 북한이나 연변 자치주에서 나오는 속담 논의에도 마찬가지이다.


참고 문헌

김기종(1989), 조선말 속담 연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김문창(1979), 속담론 서설, 강원 대학교 논문집 13집. 97-111.
송재선(1993), 상말 속담 사전, 동문선.
이기문(1981), 개정판 속담 사전, 일조각.
정종진(1993), 한국의 속담 용례 사전, 태학사.
Burger, Harald(1973), Idiomatik des Deutschen, Niemeier: Tüebingen.
Schippan, Thea(1884), Lexikologie der deutschen Gegnwartssprache, VEB: Leipz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