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말과 마음가짐
-國際化를 中心으로-

安秀桔 / 서울 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


  우리가 斥和碑를 세워 “不戰이 바로 和이고, 和가 卽 賣國"이라 하고 鎖國主義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中國과 日本은 美國과 西洋을 배우고 있었다. 그前 日本의 江戶幕府가 鎖國을 標榜하고 있을 때에도 나가사끼 (長崎)라는 곳은 열려 있어서 和蘭人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中國과 日本은 英語 等 外國語에 對한 工夫도 그만큼 뿌리가 깊고 상당한 水準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自國에서 살고 있는 限 자기 나라말은 모두가 當然히 다 잘하지만 外國人은 그렇지 못 할 것이라는 우리들의 常識과는 달리 한 나라 言語에 對해서 本國人이 아닌 外國 出身의 語學, 또는 文學 硏究家들이 제 評價를 받는 경우도 제법 있다. 다시 말해 中國이나 日本의 英文學, 또는 英語學 硏究家가 날마다 英語를 쓰고 있는 英國이나 美國의 一般 言衆을 누르고 英文學 또는 英語學에 關해서 더 評價를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나라 國民이라고 그 言語에 對해서 努力 없이 學者가 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에밀·졸리는 作家로서 무척 評價가 높은 사람이지만 自己가 젊었을 때 함께 모여 dictation(글 받아쓰기) 게임을 해서 자리를 같이 한 모든 프랑스 사람을 제치고 한 오스트리아 사람이 佛語 받아쓰기에 一等을 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 오스트리아 人이 偶然히 한 번 이긴 것으로 생각되는 狀況이 아니고 다시 한 번 되풀이했더라도 그 오스트리아 人의 佛語學이 상당한 水準에 있기 때문에 그때 同席한 프랑스 人들을 凌駕했을 것은 거의 確實한 狀況이었다고 한다. 이 逸話는 제 나라에서 자란 프랑스 入들에게도 佛語는 어렵다는 것과. 또 高度의 工夫에는 國籍의 影響이 적다는 것을 뜻한다.
  上述한 바와 같이 日本의 英語 等 外國語 關聯 學問은 相當한 水準이지만 그러나 言語와 글은 워낙이 組合이 無窮無盡하고 들여다보아야 하는 角度도 많고 보니 完璧할 것 같은 英日 辭典도 잘못 되어 있는 구석이란 있게 마련이다, 즉 그렇게 歷史가 긴 日本의 英語學 關係 底力에 아직도 구멍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물며 英語보다 硏究 人員이 적은 다른 西歐語들에 關해서는 그러한 失手란 더욱 甚해지게 마련이다. 프랑스 映畵 臺詞가 잘못 飜譯된 것, 古典的인 獨逸 歌曲(Deutsche Lieder)들이 잘못 飜譯된 事例 等도 적지 않이 볼 수 있다.
  그것이 現實이다. 外國語가 종종 잘못 飜譯된 것을 갖고 問題 삼을 것이 뭐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問題가 되는 것은 그러한 作品이 導入된 지가 오래돼서 再檢討를 하고 또 할 期間이 充分히 지났는데도 아직 失手가 散在하고 있기 때문에 問題가 되는 것이다. 可能한 것이 아직 안 고쳐 진 경우로서 時間 經過에 따라 고쳐질 수가 있는 그러한 錯誤인데 그 긴 歷史를 갖고도 잘못된 구석이 남아 있다는 것이 問題 인 것이다.
  한 나라의 글과 그 飜譯된 것 사이의 乖離는 더 本質的인 경우가 있어서 두 民族의 생각의 基盤 自體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時間이 걸린다고 해서 解決이 될 性質의 것이 아닌 듯하다.
  그中 하나의 例가 英語의 ‘decent’라는 表現이다. 그것은 떠벌이지 않고 내세우지 않는 敎養 있는 英國의 집안 좋은 紳士들의 擧動을 表現하는 代表的인 形容詞이다. 그것은 discreet(思慮 깊고 操心性 있는)이란 말과 密接한 關係가 있는 그러한 느낌으로 把握이 된다.
  이 decency는 나아가서는 English understatement(삼가는 듯한, 誇張하지 않고 오히려 多少 줄여서 하는 表現)을 聯想시키는 좋은 말이었기에 筆者는 한두 번 그러한 美德을 사람들에게 說明하고자 辭典을 찾아보았더니 바라는 바와 같은 操心性은 强調가 안 되어 있고 오히려 어떠한 水準의 것을 당당하게 要求하는 强한 이미지만 說明되어 있었다. 그것은 日本의 英日 辭典이나 韓國의 英韓 辭典이 같은 步調였다.
  關心이 생긴 김에 몇 年을 더 觀察한 끝에 이러한 乖離에 關한 筆者의 結論은 國民 氣質의 差異로 짐작이 되고 歸結이 되었다. Decent하다는 것이 口話(떳떳한 옷차림 等) 편의 뜻의 影響을 받았는지 英日 辭典의 첫머리는 “1. 보기 兇하지 않게, 2. 그럴듯한, 3. 상당한 身分의” 等으로 나온다.
  通念과 反對로 極東系에서는 사람들이 內向的으로 自己를 抑制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堂堂히 내미는 傾向이 제법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decent란 말의 本質이 제대로 理解 안 된 것 같다.
  그러나 反對로 어떠한 基準의 內的 判斷과 躊躇를 充分히 하고 그 判斷에 따라 鄭重한 處身을 하고 그런데도(남이 알지 못 해서 짓밟아 오면 더군다나) 必要하다면 무게 잡고 强靭하게 나설 수도 있는 것이 decency이기도 하니까 그럴듯한 解釋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卽 decent하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擧動을 뜻하지만 反對로 堂堂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종이 한 장 差異밖에 없는, 같은 美德을 東西洋 사람들이 어느 쪽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辭典에 나오는 順序가 다른 것으로 생각되기도 해서 같은 言語가 바탕이 다르면 差異가 있게 되는 하나의 事例로 보았던 것이다.
  紳士가 되기 爲해서 英國 사람들은 decent(modest, conform)한 擧動을 하는 것을 앞세우고 東洋圈에서는 decent(꽤 좋은, 상당한 身分의)한 옷차림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때 東洋의 내세우는 decency와 西洋의 내세우지 않는 decency의 差異로서 結局 양쪽 다 各各 그들의 方式으로 decent함이 定해진다는 뜻이다. 아무튼 筆者의 外國 滯留 經驗으로는 東洋系 辭典의 그 낱말 語感이 歐州의 그것보다 더 强하고 外向的이라는 印象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도 그러한 風士와 成長에 따른 解釋의 微細한 差異를 보여 주는 일은 또 있었다. 그것은 韓國 某 經濟 新聞에서 前職 高位層이 造船 公社의 大形 船舶 受注에 關聯된 秘話를 다루는 記事에서였다. 제법 큰 油槽船 建造를 우리에게 맡겨 달라는 韓國 政府의 要請을 들은 石油 財閥 ‘걸프’의 會長이 “low profile” 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新聞에 나온 그 이야기의 結末은(結果的으로는) 우리 要請대로 受注하게 됐다는 자랑이었는데 그 글에서는 “low profile”이라는 말을 “低娶薇로 받아들여!”라는 承諾 指示로 解釋을 하는 것이었다.
  筆者가 아는 範圍에서는 low profile이란 “이미지가 弱한데…….” 또는 “別로 알려 있지 않는데…….” 하는 것으로 그 會長의 躊躇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그 會長이 별 檢討도 안 하고 “低姿勢로 받아들여…….”라고 했다면 責任 莫重한 사람의 反應치고는 너무 卽興的이었고 그 사람 立場에서 우선 “韓國? 韓國에서 그 規模의 造船? 글쎄…….”라는 것이 그 狀況에서의 反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때마침 放學 때이기도 하고 韓國 全體가 國際化를 갖고 들썩거리는 때이기도 해서 時間을 내서 辭典을 찾아봤다. 그러나 그 low profile이라는 表現은 筆者도 嚴然히 들을 機會가 있을 程度로 比較的 흔한 表現이었는데도 가장 두꺼운 webster 辨典에도 그 熟語는 나와 있지가 않았다. 英日 辭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 學校의 英文學科 助敎를 通해 敎授에게 물어봤다. 質問을 傳해 들은 英文科 敎授의 對答은 “그 前後 文脈이 없이는 對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low profile"이라는 熟語만 내밀고 있는 그 新聞 記事에서 前後 文脈을 英語로 댈 재간은 筆者에게도 없었다.
  그런데 韓國에서 나온 英語 辭典에는 그것이 나와 있었다. 거기에는 뚜렷하게 ‘低姿勢’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다시 Oxford 辭典 等을 찾고 英日 辭典을 찾아도 헛것이었다. ‘low’에도 없었고 ‘profile’ 칸에도 나와 있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 英韓 辭典들은 어디에서 봤기에 ‘low profile’ 單語의 解釋 첫머리에 ‘低姿勢’라고 했는가? 그리고 늦게 始作한 英韓 辭典이 英日 辭典보다 낫다는 이야기인가?
  筆者의 英語 實力이 창피해서 그것으로 덮어 버리자니 아직 未練이 남고 머리 속 한 구석에 ‘弱한 印象’이라는 뜻은 繼續 맴돌고 있어서 最近에 나온 Franklin社의 電子 辭典을 찾았다. 그것은 Webster 辭典 및 같은 會社의 電子化를 爲한 補完分을 합해서 11萬 單語를 收容한 尨大한 것인데 特色으로는 搜査(searching) 機能이 있어서 電子的 方法으로 모든 單語를 하나하나 찾아 주는 것이었다. 筆者는 이 電子 辭典의 逆追跡 機能을 썼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辭典의 單語 說明 部分, 卽 풀이 便에 ‘low profile’ 이라는 單語가 나온 것을 찾았는데 그 빠른 電算 裝置로도 11分 10秒동안 돌려야 結果가 나왔다.
  거기에 가장 뚜렷한 解釋이 나와 있었다. 그것은 profile을 “公衆에 알려진 程度”로 해서 나아가서는 low profile을 “잘 알려지지 않다”로 되어 있는 것이다. profile의 뜻은 1.‘옆얼굴’, ‘아우트라인’, 2.‘履歷 描寫’, 그리고 3.‘잘 알려진 程度’로 되어 있고 이와 反對로 ‘姿勢’ 라는 뜻으로 나와 있지는 않았다.
  역시 low profile이란 말은 “별로 알려진 곳이 아닌데……” 하는 것이 맞는 解釋이었다. 그렇다면 그 回顧錄을 쓴 高位層은 우리의 要求가 얼마큼 會長의 躊躇 等 어려운 고비를 거쳐서 受容이 된 것인지를 모르고 지났다는 이야기이고 高位層들이 疑心 한 번 안 하고 韓國 辭典의 풀이만을 보고 滿足하는 程度의 ‘外國 理解’를 갖고 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걸프 會長이 그때 ‘低姿勢’란 우리 편의 엉뚱한 말을 들었더라면 決定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韓國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辭典 編纂하는 사람들도 대강 한 會社에서 하면 다 따라가는 生理들이니까 남의 內容 따라간 사람은 제쳐놓고라도 처음 辭典에 低姿勢라는 풀이를 첫머리에 넣은 사람은 무척은 勇敢했고, 아마도 그 瞬間은 그것도 모르느냐고 日本의 辭典 編纂人들을 蔑視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辭典에서 low-profile이라고 ‘-’를 넣은 경우에 나온 ‘low key’라는 말도 ‘强度가 弱한’ 또는 ‘强度를 누른’으로 나와 있지 ‘低姿勢’로 나와 있지는 않는데 왜 ‘삼가다’나 ‘强度를 누른’이라는 풀이가 低姿勢로 理解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問題인 것이다. 卽 우리의 生理가 果然 ‘삼가는 것’, 또는 ‘强度를 누른’ 것을 ‘低姿勢’와 같은 것으로 보느냐 하는 데에 問題가 있는 것이다.
  “姿勢”는 國語辭典에 ‘相對方에 눌려서 卑下하는 姿勢’로 되어 있다. 적어도 西歐에서는 웬만한 경우 삼가거나 强度를 누르는 것은 紳士 處身의 基本이지만 相對方이 누르려 들 때 쉽게 低姿勢가 되지는 않는다. 不當한 壓力에 對해서는 그리 쉽게 굽히지를 않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우리 식으로 統率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紳士의 素養으로 어려운 狀況에서 sense of humor를 갖는 것도 뒤를 爲해서 重要한 일이다.
  “힘이 있으면 誇示해야 하는 것이고, 삼가거나 强度를 줄이면 힘이 없는 것이다”하는 그러한 思考方式이 English understatement를 우습게 알다가 큰 코 다치는 것이고 decent를 ‘근사하게 입고 堂堂하게 구는 것’으로 둔갑하게 만든 要因이 되는 것이다.
  附加 價値 情報網 事業을 하게 된 濠州系 會社의 開業 祝賀宴에 가서 韓國에 英語를 가르치기 爲해 美國에서 온 英語 敎師를 만나게 되었다. 偶然히 이야기는 그 ‘low profile’ 에 關한 質問으로 흘러갔지만 그 사람의 解釋도 筆者의 見解와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아직 Webster의 電子 逆辭典으로 시원한 解決이 되기 前이었는데 그 사람도 筆者의 解釋이 옳다는 것이었고 이 原稿를 最終 整理할 무렵에 Webster 큰 辭典의 6,000 單語 補完을 보게 되었고 熟語 辭典들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low profile이 正式으로 다뤄져 “눈에 띄지 않는 方法과 擧動”이라고 나와 있었다.
  國際化 時大가 到來하면서 우리는 外國語를 공부하는 理由가 相對편의 氣質과 感情을 理解하고 共存하는 데에 있다. 이를 爲해서는 우리는 外國 사람들이 왜 우리를 ‘거칠다’고 하는지를 알고 우리도 거칠지 않는 decent함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이 decency를 못 갖출 때 交涉하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成功시키건 understatement와 다소곳함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의 交涉은 難關을 겪게 마련이다. 經濟 數値로 世界 14位라는 자리를 堂堂히 차지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는 마음의 餘裕를 갖고 友情的인 行動을 하고 ‘sense of humor’를 갖추고 decent하여야 한다.
  結局은 相對便도 본전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交際나 去來의 뒷맛이 무던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 짧고 短期 利益이나 우선 體面 等 때문에 티격태격해서는 긴 눈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利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來日 다시 보게 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