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산책]

요즘 자주 쓰이는 말의 되짚어 보기

박노준 / 한양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벌써 일년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시대의 교체와 변화를 알리기 위해서, 또는 국정의 새로운 지표를 표방하기 위해서 참신한 구호를 내세우는 것이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적 관례로 통하고 있다. 민심을 일변시키고 보다 나은 정치를 펼쳐 보겠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 환영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새 정부도 역시 생동감이 넘치는 구호를 외치면서 닻을 올렸다. ‘신한국 건설’이니 ‘한국병 치유’니 ‘개혁’이니 하는 것은 정권 초기의 슬로건이고 요즘 와서는 ‘국제화, 세계화’가 우리의 살길이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성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만 외침 자체는 시대 정신을 꿰뚫은 것이라서 결코 탓할 것이 없다.
  이런 구호 이외에도 이 정부는 집권하면서부터, 아니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부터 새로 출범하는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크게 비중을 두었다. 그것이 바로 ‘문민 정부’라는 것이다. 일년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현 정부의 이 현판은 집권 초기 때와 마찬가지로 그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누가 이 ‘문민 정부’라는 새 정권의 문패에 이의를 달랴. 30년간이라는 일시적인 군사 정권과 결별을 고하고 역사적으로 차별성의 획을 긋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문민 정부’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이미 일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여 조용히 생각하거니와 군사 정권을 퇴장시킨 열기 속에서 한시적으로 부르짖으면서 기뻐해도 족할 문패에 그렇듯 계속해서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이 글에서도 ‘새 정부’라는 말을 썼지만 그것도 시효가 끝난 것이고 그냥 ‘정부’, ‘현 정부’ 또는 ‘김영삼 정부’라고 지칭하면 될 터, 그럼에도 이미 이 정부가 민간 정부로 그 뿌리를 튼튼히 내려서 우리들의 의식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이 마당에 ‘문민 정부’라는 이름을 거듭 앞세울 필요가 있을까?
  이렇듯 ‘문민 정부’라는 용어를 가급적 자제해서 쓰자고 의견을 제시하게 된 데에는 다음 두 가지의 심리적 요인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정부’는 민간에 의해서 선출되고 조직되고 성립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당연한 원칙이 일년 전에 마침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 30년 동안은 일종의 역사적 반역이었으며 따라서 그 정부는 그때도 ‘군사 정권’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명명하면서 그 부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를 부각시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정부는 경우가 다르다. ‘문민’이라는 접두사가 이젠 거의 필요가 없다. 원상으로 회귀된 마당에 ‘정부’, ‘현 정부’ 또는 ‘김영삼 정부’면 족하다는 말이다.
  둘째, ‘문민 정부’는 요컨대 ‘군사 정권’을 전제로 해서 그것 때문에 만들어 낸 시대성이 짙은 특수한 명칭이요 용어다. 이런 불행했던 시대적 배경을 상기하면서 우리 한번 차분히 생각해 보자. ‘문민 정부’라는 문패를 계속 달고 있다는 것은 자칫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군사 정권’을 계속 전제로 하고 또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논리와 통한다.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앞으로도 그런 심리적인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우리에겐 단연코 없다. 이젠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역사의 퇴행, 곧 ‘군사 정권’의 재등장이라는 불행을 원칙적으로 막자는 충정에서도 ‘정부’라는 명칭 위에 어떠한 접두사도 올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화제를 바꿔서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거처하고 집무하는 곳인 ‘청와대’에 대해서 얘기해 보기로 하자. ‘경무대’가 ‘청와대’로 이름을 바꾼 것은 제2공화국 대통령인 윤보선 씨에 의해서다. 개명한 것은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새로운 명칭인 ‘청와대’라는 이름이 어쩐지 탐탁지 않다. 당시에도 뜻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돌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헐린 그곳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청와대’라고 명명한 것이 작명하게 된 배경의 전부인데 미국 대통령의 관저인 ‘백악관’을 본따서 지은 이름임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실례의 말씀 같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몸담고 있는 처소의 이름으론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다. 더욱이 시중에 ‘청기와 주유소’, ‘청기와 예식장’이 그 이후에 생겨나서 이런 영업소 이름과 동명 이소(同名 異所)가 됨에 따라 이젠 변별성마저 상실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궁궐의 여러 이름이나 선비들의 택호(宅號)와 재호(齋號)를 지을 때는 전통적인 관행이 있는데 어떤 경우이든 거기에 깊은 뜻을 부여하여 정사에 임할 때나 학문을 연마할 때 그 심오한 뜻을 되새기면서 선정을 지향하고 바른 학문과 수양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런 좋은 관행을 군주 시대가 아닌 현대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할 이유가 있을까? 국민을 환호케 할 멋진 정치를 펼치면 그만이지 관저의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기왕이면 거처하고 집무하는 곳의 명칭도 그럴 듯하면 더욱 금상첨화일 터, 거듭 실례의 말씀이지만 대통령 관저를 ‘청기와 집’이라고 명명하는 데는 계속 아쉬움이 남는다.
  ‘청와대’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청남대’는 또 어떠한가? 남쪽에 위치해 있는 청와대라고 해서 청자(靑字) 돌림에 따라 ‘청남대’라고 제5 공화국 때 명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폐일언해서 사려 깊은 작명은 아닐 것이다. 실은 ‘청남대’에는 푸르다는 뜻과 남쪽이라는 뜻만 있고 남쪽 청와대라는 뜻은 없으니 본질적으로 빗나간 이름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하는 얘기인데 몇 달 전에 청와대 구 본관을 시원하게 헐어버린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이전에 한옥으로 된 대통령 관저가 새로 건립된 사실도 알고 있다. 그 건물도 청기와로 되어 있는지 여부 같은 것은 따지지 말기로 하자. 과거를 청산하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괘념할 겨를이 없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결의와 의지를 반영해도 좋고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고수하겠다는 정신을 천명해도 좋고 어쨌든 그런 뜻이 함축되어 있는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는 점을 밝혀 두기로 한다. 하찮은 일 같지만 이름이니 일상어니 하는 것이 개인과 국민 전체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올해에 접어들면서 정부가 열심히 부르짖고 있는 구호가 바로 ‘국제화’다. 국제화만이 우리가 살 길이요 21세기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첩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워낙 갑자기, 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외침이라서 어리둥절한 것도 사실이나 우루과이 라운드다 뭐다 해서 이젠 자국 위주로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용어에 전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용어 사용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고유한 모든 것을 고수하면서 국제적인 질서에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곧 ‘국제화’인데 이것을 지구와 다른 외계와의 대칭 개념으로 사용되는 ‘세계화’와 또는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주로 타율과 피동적인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개방화’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이 점은 얼마 전에 사려 깊은 학계 어느 인사에 의해서 신문 지면을 통해 문제점으로 제기된 바 있고 따라서 이런 목소리를 정부 당국자도 듣고 있을 터이므로 조만간 개념상의 혼란이 불식되리라 기대해 보기로 한다.
  심각한 국면은 다른 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른바 국제화 시대라고 해서 앞에서 말한 용어의 본 뜻과는 달리 우리 것은 버리고 온통 외국의 문물과 사고 체계에 푹 빠져 버리면 이 노릇을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 그리고 의식 구조를 점검해 보면 알 일이다. 가정에 앉아 있거나 길거리에 나가 보면 넘치느니 ‘외국’이다.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범위를 좁혀서 종교와 이데올로기만 두고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외세에 약한 국민인지를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삼국 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들어온 각종 종교와 이념들, 이들의 실태는 어떠한가? 건전하게 믿고 천착하는 예도 적지 않지만 또 한편으론 그것의 원산지인 본바닥을 무색케 하는 광적인 현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정부에서 적극 권장하고 공인하는 ‘국제화’까지 가미되면 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까?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용어 또한 범상한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구호로 바뀌었다. 이런 위험한 전환기에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의 고유한 문물을 지키면서 현명하게 외국 것을 수용하는 노력이 필요할 터이고 그러기 위해서도 ‘국제화’라는 용어를 너무 크게, 너무 자주 외쳐 댈 것이 아니라 가급적 적절한 음량과 간격을 지키면서 발설하는 지혜를 터득함이 마땅할 터이다.
  범박한 용어가 강렬한 구호로 바뀌고 그것의 사용 빈도수가 마침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파생된 사회적 병리 현상을 더도 덜도 말고 하나만 들어 보자. ‘산업화’니 ‘과학화’니 하는 구호야 얼마나 좋은가. 그것 때문에 우리의 경제 형편이 이만큼 좋아진 것 아닌가. 그러나 역기능도 엄존하고 있음을 왜 숨기려 하는가. 60년대 이래 오늘날까지 심하게 말해서 자고 일어나면 오로지 예의 구호만 편향되게 부르짖다 보니 이제 우리 사회는 그 소중한 ‘인문 정신’은 거의 소멸되어 버렸고 그리하여 도덕과 윤리, 겸양과 공동체 의식은 고사 직전에 놓여 있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구호의 무절제한 사용이 의식, 무의식간에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온다는 사실을 ‘국제화’를 외칠 때마다 되새김질하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시사성이 있는 어휘들을 올려놓고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였으니 계속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기로 하자. 신문을 볼 때나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를 볼 때마다 역겨울 정도로 필자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이 다름 아닌 ‘문화’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엔 웬 ‘문화’가 그리도 많고 그리도 지천으로 깔려 있는가? 이제까지 30초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상 들어서 귀에 익숙한 ‘문화 아닌 문화들’을 주워 섬겨 보기로 하자. 시위 문화, 놀이 문화, 향락 문화, 소비 문화, 화장실 문화, 주방 문화, 음주 문화, 교통 문화, 거듭 밝히거니와 이것을 나열하는 데 불과 30초쯤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1분이나 2분쯤 여유를 두고 행진을 계속토록 하면 아마 수십 종의 문화의 탄생은 난산의 진통 없이도 가능하리라.
  맞바로 묻기로 하자. 이런 것도 ‘문화’에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인가? 원래 ‘문화’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모두 ‘고급스럽고 고상한 것의 소산’을 일컫는 용어인데 이런 너절하고 지저분한 것들까지도 모두 ‘문화’ 운운할 수 있는가? 그저 관행이나 일상적인 습관 또는 예절 정도로 대접해 줘도 무방한 대상들을 무슨 시위 문화니 화장실 문화니 또는 향락 문화니 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떠들어 대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얘기다. 하기는 모택동이가 홍위병들을 선동하여 그 난동을 부린 사기극까지도 ‘문화 혁명’이라 했으니 언필칭 ‘문화’란 때론 그렇듯 너그럽고 포용력이 강한 어휘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화’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어휘 끝에다 굳이 ‘문화’라는 말을 뒤따르게 한 저간의 딱한 사정을 왜 우리인들 모르랴. 이를테면 화장실 사용 실태나 시위 행태가 하도 엉망이고 저질이라서 이걸 높은 수준인 문화의 반열에까지 끌어올리자는 지향과 기대감이 만들어 낸 조어임을 누구인들 눈치채지 못하랴. 그래도 그렇지 습관이나 서양말로 에티켓 정도로도 충분히 호소력을 획득할 수 있는데도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문화’를 이렇듯 무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분별력이 없이 사용하는 어디 이것 뿐이랴. ‘문화’의 남용 또는 오용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 바로 ‘정서’라는 말이다. 감정이 질서화된 것이 ‘정서’인데 이걸 마구잡이로 쓰고 있다. 들끓는 감정임에도 이런 현상을 옮기는 데에 가당치도 않게 ‘정서’다. ‘여론’이니 ‘민의’니 하는 말로도 충분하고 또 앞뒤 사정이나 문맥으로 보아서도 그렇게 써야 될 경우에도 무조건 ‘정서’를 끌어들이고 있다. 요컨대 ‘감정’이든 ‘여론, 민의’든 따지지도 않고 통틀어서 ‘정서’ 하나로 묶어 버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으로 통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 정서, 농민 정서, 근로자 정서, 학생 정서, 시민 정서, 군인 정서, 사용자 정서… 이렇게 나열하는 데는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외국 사람이 우리더러 문화와 정서 좋아하네 하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서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다.
  우루과이 라운드 때문에 농민들이 격분한 것은 그들의 ‘감정’이다. 그러니 ‘정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투표권 행사를 20세에서 19세로 낮추어 달라고 학생들이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여론’이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정서’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작년에 있었던 낙동강 오염 사건, 떼강도 사건, 장영자의 돈 장난 사건, 이런 것들을 대하는 국민들의 마음의 흐름도 ‘국민 감정’이지 ‘국민 정서’는 될 수 없다. ‘정서’라는 말이 ‘감정’이나 ‘민의, 여론’보다 훨씬 윗자리에 놓여 있는 말로 알고 남용하는 모양들인데 그 뜻이나 제대로 알고 마땅히 사용할 자리에 가서 자신 있게 애용하는 수준에 도달할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문화 민족’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 캠퍼스 안에서 범람하고 있는 신조어의 실태는 또 어떠한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일은 곧 창조 행위에 해당된다. 창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일부 젊은이들은 깊이 생각하고 검증하는 과정도 생략한 채 신조어를 급조하여 지각 없이 통용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자주 목도한다. 그 허다한 실례를 여기서 일일이 소개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다만 앞으로의 주의를 환기시키자는 뜻에서 하나만 거론키로 한다.
  신입생을 가리켜 ‘새내기’라고 부르고 있다. 선배인 재학생들이 새로 입학한 후배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고 신입생 자신들도 또한 그렇게 자칭하고 있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실례요 망발이다. 자칭일 경우에는 자기 비하가 된다. 우리말에서 ‘내기’가 들어가면 그것은 거의 낮춤말로 굳어진다. ‘풋내기’ ‘신출내기’ ‘뜨내기’라는 말이 다름 아닌 비칭임을 새삼 떠올리면 사리는 분명해진다. 뿐이랴. 경상도 지방에서는 지금도 서울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기자는 뜻에서 ‘서울내기’라고 부르고 있는가 하면 북쪽에서도 그들 사회의 소위 고위층 지도자를 조롱키 위해서 ‘햇내기’라는 비칭이 주민들의 은어로 통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신입생이라는 한자어 대신에 순 우리말을 만들어 사용코자 하는 의도는 가상하나 앞뒤 가리지 않고 엉터리 조어를 조작해 내는 일만은 삼가야 할 것이다.
  구호를 외치거나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지극히 섬세함을 요구한다. 때를 적당하게 탈 줄 알아야 하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절하면서 쓸 줄 알아야 한다. 글자를 아무렇게나 집합시킨다고 어떤 고유 명사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뜻을 함축시킬 때 비로소 똑 떨어지는 이름이 되며 어휘의 뜻을 분별해서 사용하여야 만 그 말이 문화적인 용어가 된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 때에는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각기 본보기 하나씩을 들어 살펴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