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의 지명]

扶餘 地方의 地名

조 항 범 / 충북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서론

  사람이 모여들어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 공동체가 적건 크건 그것을 표시하는 명칭이 부여되기 마련이다. 또한 공동체 삶과 밀접히 관련된 주변의 자연물에도 자연스럽게 명칭이 결부된다. 그리고 자연물 근처에 공동체가 형성되면 그 명칭의 그대로 마을 명칭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들 마을이나 그 마을 부근에 존재하는 자연물(즉, 강, 내, 산, 고개, 골, 나루 등)에 부여된 명칭들이 이른바 넓은 의미의 ‘지명’이다. 이들 지명은 순전한 언어 논리로 따진다면 누구나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편리한 쪽에서 만들어진다.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편리한 명칭이란 무엇보다도 대상과 이름 사이의 관련성이 뚜렷한 단어이다. 전래되는 옛 지명이건 최근의 새 지명이건 이러한 유연성은 명명의 일차적 근거가 되고 있다. ‘밀밭’이 많은 마을이어서 ‘미랏골>미락골’이라 했다든지, 최근에 새로 조성한 마을이어서 ‘새마을’이라 한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방식이다.
  이들 예에서 보듯, 이러한 유연성은 이른바 지명의 전부 요소에 반영되고 드러난다. 반면, 후부 요소는 지명의 근간을 이루는 명명의 핵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 지명의 전부 요소는 그 지명의 명명 동기나 생성 유래를 알려 주고, 후부 요소는 지명의 근간을 이루는 핵어의 존재 및 그 핵어의 분포와 유형을 알려 준다.
  따라서 지명 연구의 목적은 전부 요소와 후부 요소의 비중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연구의 진행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명 연구는 두 요소를 같은 비중으로 함께 다룰 때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두 요소를 개별적으로 다루거나 비중을 달리해서 다루기보다 두 요소를 함께, 그것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다만 명명에 이용되는 핵어가 그 전부 요소보다 특징적이고 유형적이라는 점에서 연구의 진행 방식은 후부 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고는 여러 지명을 중 扶餘 지역 지명에 국한하여 주목한 것이다.2) 부여는 백제와 그 영욕을 함께한 찬란과 슬픔의 이중의 왕도였다. 熊津 천도 후 123년 동안 섬세 미려한 백제 문화를 잇고 번창시킨 환희의 도시였으며, 羅唐 18만의 침략군에 수백 년 사직과 화려한 문화를 온통을 짓밟힌 비운의 고도였다. 그 침략의 만행이 어떠했는지, 사비성은 七畫夜의 방화와 약탈의 아비규환이었다. 그 후, 백제는 물론 부여에 대해서 그 찬란함보다는 비애와 비통을 더 느끼고 안타까워해 온 천년 恨이다. 그만큼 패망의 상처는 깊고 컸으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백제에 대해 더 이상 비애와 한이 아닌 영광과 환희로 분명히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유린된 도탄의 늪에서나마 화려하고 찬란한 유물들이 햇빛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이룩된 고고학적 성과는 백제의 정체와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은 여지없이 입증되었다.3)
  그러나 아직 우리는 백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특히 무형의 예술이나 언어에 대해서를 더욱 그렇다. 백제의 언어에 대해서는 한반도 언어의 주류가 아니었다는 이유에서 한동안 관심권 밖에 있었다. 최근 몇몇 학자에 의해 차자 표기된 지명을 중심으로 백제어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자료의 영성함과 방법론의 부재로 여전히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답을 얻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4)
  차자 표기된 지명이 백제어를 이해하는 일차적 대상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자료라면 다른 쪽으로도 눈을 돌려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으로서는 백제어를 이해하는 데 현존하는 고유어계 지명만큼 좋은 자료는 없을 듯하다. 지명은 토착성과 보수성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천년 이상의 풍파 속에서도 그 본질을 일부라도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오랜 세월 속에서 변개된 지명일지라도 그것이 같은 언어권 내에서의 변화라면 나름대로 백제어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지명 중에서도 ‘공주’나 ‘부여’ 같은 왕도 근역의 지명은 백제 시대의 언어나 그 후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우선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백제적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명이 아무리 보수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채 투명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지명 요소의 일부가 다른 유의어로 대체되거나 자체의 심한 음운론적 변개로 전혀 다른 형태를 띨 수도 있기 때문에, 지명을 통한 고대어 연구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백제 지역의 지명 연구를 통해 백제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는 애초부터 무리다. 백제어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부진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여 지역의 지명 연구는 지금까지 문헌을 중심으로 이룩된 백제어 연구의 성과를 보충하거나 보강할 수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본고는 부여 지역 지명, 특히 고유어계 마을 명칭을 중심으로 그 특징적 면모를 살펴보고, 가능하다면 지명에 화석화되어 남아 있는 백제어계 요소를 찾는 데 관심을 두기로 한다.


2. 지명의 형성과 어원적 해설

      2.1 마을 명칭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부여 지역의 마을 명칭에도 다수의 후부 요소들이 결부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뜸, 말’ 등과 같은 본질적인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가 있는가 하면, ‘골(울), 실, 거리, 다리, 고지, 뫼(미), 터, 재, 펄, 바위, 기, 들, 개, 밭’ 등과 같이 자연물 명칭에서 마을 명칭으로 바뀐 이차적인 후부 요소도 있다. 그리고 ‘안, 머리’, ‘-이, -애’ 등과 같이 이차적인 후부 요소라도 앞의 것들과 성격을 달리하는 후부 요소도 있다.
  여기에서는 마을 명칭에 자주 등장하는 후부 요소 몇 개를 중심으로 기술해 보기로 한다.


          2.1.1 뜸

  한 동네는 몇 집씩 모여 이루어진 소구역이 어울려 이루어진다. 이러한 동네를 이루는 소구역을 흔히 ‘뜸’이라 한다. 따라서 이 ‘뜸’은 마을 구성의 최소 단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뜸’은 사전적 의미로는 ‘동네’나 ‘마을’과 같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부여 지역 ‘뜸’계 마을 명칭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a. 속뜸(속말): 내리
위뜸: 함양리
안뜸(알말): 경둔리. 산직리. 만수리. 금곡리
개뜸: 비정리
골뜸(谷村): 마정리
재뜸(잿뜸): 옥곡리. 청포리
새뜸(新垈): 산직리
벌뜸: 구교리. 삼산리. 전장리
큰뜸(船西): 금천리
b. 아래뜸(아래말): 함양리. 반교리
가운데뜸: 신암리
구억뜸(궉뜸. 旺村): 진호리
들안뜸(돌안뜸): 청포리
       
(2) a. 변뜸(새터. 新垈): 현내리
상뜸(上村): 산직리
신뜸: 신암리
원뜸: 소사리
유뜸: 반교리
장뜸: 옥곡리
중뜸(中村): 천당리. 가회리. 신성리
표뜸(表村. 上天): 천당리
b. 양지뜸(양지말. 陽村): 동사리. 대선리. 청송리. 합수리. 석동리
음지뜸: 대선리
정주뜸: 원당리
       
(3) 외뜸말: 지석리
새뜨말(新垈里): 군수리
  위의 지명 예에서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부여 지역 마을 명칭에 ‘뜸’계 명칭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미 보고되어 있지만5) ‘뜸’계 지명은 여타 지역보다도 충남이나 전남 지역에 특히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데, 부여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듯 ‘뜸’계 지명이 백제권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단어가 백제어계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뜸’이 이 지역의 고어 범주에 들 것이라는 사실은 (3)의 ‘외뜸말, 새뜨말’과 같은 동의 중복형 명칭에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 명칭은 정상적 의미 기능을 수행하던 ‘뜸’이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같은 의미의 ‘말’를 첨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뜸’의 의미 기능 상실과 ‘말’로의 대체는 이것의 역사성과 보수성을 아울러 말하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부 요소‘뜸’이 이 지역에서 일률적으로 ‘뜸’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사실이다. 이 ‘뜸’은 지역에 따라 ‘듬, 담, 땀, 떰, 똠, 뚬, 더미, 두미, 대미, 드메’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중 ‘듬’이 그 본래의 원형에 가깝고 다른 것들은 그것의 이형태로 생각된다.6) 이 ‘듬’의 기원적 의미에 대해서는 대체로 [圓],[四圍]로 보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이돈주:1966, 강병륜:1990, 박병철:1991). 이러한 사실은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4) a. 耽津縣本百濟冬音縣 <三國史記 卷三十六>
b. 漢拏山在州南一曰頭無岳又云圓山<世宗實錄地理志 卷一百五十一>
  위의 예문의 한자 표기 ‘冬音’과 ‘頭無’는 바로 ‘듬’이나 그 이형태에 대한 音借 表記이다.7) 위의 예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頭無岳’이 ‘圓山’과 같다는 것인데 이로써 ‘頭無’와 ‘圓’의 대응 관계가 성립된다. 앞의 것은 音相을, 뒤의 것은 意味를 알려 주어 ‘頭無’가 [圓]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마 한라산의 형세가 전체적으로 둥글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전남 해남의 大芚山을 ‘한듬’(산)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닌가 한다.
  위의 기록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한라산은 물론 그것이 있는 지역, 즉 섬 전체에 그것과 동일한 명칭이 부여된 사실이다. 이것도 섬의 모양이 둥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본래의 ‘듬’이 [圓]의 의미를 지니며, 자립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圓]의 의미를 지니는 ‘듬’이 적용 범위를 넓혀 그러한 특정 모양을 하고 있는 대상에 확대 적용된 것이 마을 명칭이나 산 명칭의 그것으로 볼 수 있다. ‘듬’계 지명의 지역이 대체로 ‘산이나 골짜기와 같은 큰 자연물로 둘려 있는 둥근 분지’라는 사실도 ‘듬’의 본래의 의미와 의미 변화 과정을 살피는 데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듬’이 [圓]이라는 의미로부터 출발한다는 근거에서 강병률(1990)은 현대 국어 ‘둠(못), 둠벙(웅덩이), 두메(깊은 산골), 두멍(물을 길어 쓰는 큰 가마나 독)’ 등을 그 발전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박병철(1991)은 중세 국어 ‘두렵다(圓), 둘에, 두렷다(圓)’, 현대 국어 ‘두르다’까지 이것과 동계어로 처리하고 있다.8)
  위에서 언급된 내용을 간추리면, ‘뜸’의 기원형 재구는 어렵지만 그 원의는 [圓]이었다는 것, 점차 적용 범위를 확대해 산이나 마을 등 둥근 모양을 한 일반 대상을 가리킬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자립 기능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립 형식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지명의 후부 요소로 화석화되어 존재할 뿐이다.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의 ‘뜸’은 ‘里, 村’ 등의 한자와 대응되어 [마을]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뜸’계 지명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는, 선행하는 전부 요소에 일음절 명사가 많다는 것이다. (1)a의 그것이 고유어라면, (2)a의 그것은 한자어이다. ‘뜸’에 선행하는 고유어에는 ‘속, 위, 안, 아래, 가운데 ’등과 같은 위치 지정 단어들이 많다. 이것은 ‘뜸’이 동네의 작은 단위를 가리키므로 위치로써 그 지역을 지정하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개, 벌, 골’ 등과 같이 구체적 지역을 가리키는 명사도 있는데 이들도 ‘개’(浦)가 있는 쪽, ‘벌’이 있는 쪽, ‘골짜기’가 있는 쪽이라는 방향을 지정한다. ‘새’는 이것이 [新]의 그것이라면 이것도 새로 생긴 쪽이라는 방향을 지시한다.
(2)b의 한자어 중‘中, 上, 新, 陽地, 陰地’정도가 방향 지정이 분명할 뿐 ‘변, 원, 유, 표’등은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
  ‘상뜸’은 ‘위뜸’, ‘중뜸’은 ‘가운데뜸’, ‘신뜸’은 ‘새뜸’과 대응된다. 이들 한자어계 명칭은 고유어계 명칭보다 후대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변뜸’은 順天府使를 지낸 邊氏가 입촌하여 살았기 때문에, ‘표뜸’은 新昌 表氏가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뜸’은 예전에 장이 섰던 곳이라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뜸’계 지명은 전부 요소뿐만 아니라 후부 요소도 변화를 입는다. 그것은 ‘속뜸’에 대한 ‘속말’, ‘안뜸’에 대한 ‘안말’, ‘아래뜸’에 대한 ‘아래말’등에서 확인된다. 이들은 ‘뜸’계는 지명과 ‘말’계 지명이 공존하는 경우인데, 대응 분포가 한정적이고 ‘말’계 지명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후자가 전자의 대체형일 것으로 추정된다.


          2.1.2 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부여 지역에 ‘말’계 지명도 다수 나타난다. 그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5) a. 돌말(石村): 외리
골말(골뜸): 만사리. 정동리. 귀덕리. 석동리
범말(虎洞): 신흥리. 만지리
넘말: 동사리
갯말: 반조원리
안말(內洞. 中里. 안뜸. 內村): 내성리. 경둔리. 추양리
윗말: 벽룡리. 복덕리
벌말: 장벌리
새말: 신리. 현내리
속말(속뜸): 내리
b. 새터말(새텃말): 금사리. 청포리. 원문리
소라말(松村): 마정리
황새말: 묘원리
대숲말(竹林): 운티리
새뜨말(新垈里): 군수리
가음말(갯말): 반조원리
아랫말: 장항리
아래말: 복덕리. 연화리
방중말: 중양리
건너말(越村): 북고리
왁새말(鶴村): 장하리
기왓말: 청송리
윗새말: 청송리
넘어말(중뜸): 천당리
바깥말: 외리

(6) a. 백말(白村): 진변리
역말(驛村): 합곡리. 교원리
중말(竹村): 장산리
점말: 점상리
성말: 군수리
b. 건지말: 나복리
학교말: 반산리
양짓말(陽村): 마전리
음짓말(陰村): 마전리
산소말: 전장리
산직말(산정말. 산징말): 전장리. 은산리
석성말: 현북리
장짓말: 가회리
박가말: 족교리
용수말: 비암리
장인말: 군사리
평전말(평정말): 신암리
외뜸말: 지석리
등자말: 홍랑리
  위의 예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그 높은 빈도수이다. ‘말’의 높은 빈도수는 이것이 마을 명칭 생성의 생산적인 후부 요소였음을 알려 준다. ‘말’의 후부 요소로서의 생산적 기능은 이 ‘말’의 기원적 형태와 의미를 살펴보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말’은 [里, 村]을 뜻하는 중세 국어 ‘’에 소급한다. 일단 이 ‘’로부터 ‘>>>말’의 과정을 거쳐 고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부터 [마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 명칭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중세 국어 ‘’ 후대형은 ‘마을’이라는 점에서 과연 지명의 후부 요소 ‘말’이 ‘마을’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변화를 거쳐 온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지명의 2음절 후부 요소는 1음절로 쉽게 축약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9)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말’의 이형태로 ‘물’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변화 과정을 부인할 수도 없다(충북 괴산 지명에 ‘여시물, 승지물’ 등이 보인다). 따라서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의 ‘말’에는 ‘’로부터 독자적으로 변해 온 것과 ’마을‘에서 축약된 두 종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후부 요소의 ‘말’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후부 요소로 고정되면서 유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 명칭에 자연스럽게 결부된 것으로 이해된다. 부여 지역의 마을 명칭 모두가 ‘마을’이나 ‘말’의 이형태 아닌 ‘말’로만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매우 일찍부터 유형화 내지 범주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마을 명칭은 ‘말’대신 ‘마을’를 선호하고 있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것은 그만큼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의 ‘말’의 기능 쇠퇴를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말’계 지명 예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선행 요소에 1음절 고유어는 물론 2음절 고유어도 많고 2음절 한자어가 많다는 것이다. 대신 1음절 한자어는 그리 많지 않다. 1음절 고유어가 많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뜸’과 같은 양상이나 1음절 한자어가 적고 2음절 한자어가 많다는 것은 이것과 다른 양상이다. 선행 요소에 2음절 한자어가 많다는 것은 ‘말’의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의 생산성을 알려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행하는 전접 요소는 그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안, 위, 아래, 중, 건너, 넘’ 등 위치를 직접적으로 지정하는 어사, ‘골, 개, 벌, 방중(방죽)’ 등과 같은 구체적인 자연물을 끼고 있거나 그쪽에 있음을 알리는 어사, ‘범, 황새, 소라, 왁새’10) 등과 같은 특정 모양새를 하고 있음을 알리는 어사, ‘대숲, 학교, 산소, 기와, 역’ 등 그 지역에 특징적인 무엇이 있음을 알리는 어사 등 다양하다. 전말에 의하면 ‘황새말’은 어떤 선비가 아낙이 건네 주는 버들잎을 띄운 표주박 물을 마시려 할 때 황새가 날았다 하여 그러한 명칭이 생겼다고 하고 ‘戰場말’은 조선조 때 여러 번의 전쟁을 치르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돌말’은 마을에 돌이 많고 마을 중앙에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는 바위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죽말>중말’은 대나무가 많아서, ‘채종말’은 여 말 선 초 최씨가 많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의 유래 설명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분명한 의도적 작위도 엿보인다. ‘중말’은 대나무가 많아서가 아니라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말’은 ‘가운데말’과 대응된다.


          2.1.3 골

  부여 지역의 ‘골’계 마을 명칭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7) a. 절골(寺谷): 정각리. 간대리. 동사리. 두곡리
절굴(寺洞): 금사리
절꿀(샴쥭굴): 반교리
띠울(茅里. 茅洞): 모리
샘골(井谷. 泉洞): 마정리. 정동리
범골(虎洞): 청송리
안굴(內垈.內谷): 갈산리. 장벌리. 비정리
뒷골(後洞): 홍산리
텃골(基谷): 천당리
개골: 시음리
방골(栗谷.栗洞): 신안리 
텃골: 송곡리
앳골: 석성리
매골(鷹洞): 응평리
새울(鳳谷. 초리): 초평리
대울(新垈): 신정리
갈울(葛洞): 송간리
b. 대숲골(竹洞): 구봉리
바랑굴: 나복리
가농골: 세탑리
고추골: 수고리
도파골: 반교리
큰터굴: 각대리
쇠죽굴: 군사리
피아골: 소사리
버드골: 회동리
두므골: 두곡리
뒤웅굴: 금지리
불무골: 화수리
무논골: 합정리
마루골(말골. 允洞): 수원리
가재골: 태양리
모시울: 저동리
구레울(勒洞): 천보리
가재울: 가중리. 석동리
안재울: 경둔리
잣재울: 장벌리
황새울: 구교리
모가올: 벽룡리
가자울(加子谷): 수원리

(8) a. 상굴(上谷): 죽교리
욧골(堯谷): 신리
와굴(檜洞): 회동리
탑골(塔洞): 가탑리
목골(木洞 木谷): 사산리
샘골(泉洞): 시음리
용골(龍谷): 가화리
b. 송죽골: 죽교리
서당골: 내리. 벽룡리
용추골: 오수리
서원골: 교원리
분터골: 가증리
향교골: 구곡리
유가골: 귀덕리
덕룡골: 벽룡리
목수굴: 암수리
회정꿀(回洞): 삼산리
(9) 구수내골: 원당리
가리점골: 가덕리
배나무굴: 반교리
옥삼박골(玉三外谷): 반조원리
옻나무골(漆木里): 대양리
사창이골: 증산리
갑나무골: 정각리
  위에 소개한 지명 예만 보더라도, 부여 지역에 ‘골’계 마을 명칭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100여 개가 더 존재하므로 ‘골’이 가장 일반적인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골’을 [城]을 뜻하는 고구려어 ‘忽’로 소급하여 이해하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리고 만주어 ‘holo’(山, 谷)와 같은 계통으로 파악하여 ‘holo>kolo>kol’의 과정을 설정하는 데에도 별 이견이 없다. 이러한 결론에는 [谷]의 ‘골’이 [城]이나 [洞]의 의미로 전이되어 사용되었다는 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 중세 국어의 ‘골’이 [谷]은 물론 [洞]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어 [谷]에서 [洞]으로의 의미 변화는 가능해 보인다. ‘용비어천가’에 보이는 ‘답상골(答相谷), 가막골(加莫洞), 뒷골(北泉洞), 다대골(韃靼洞), 래올(楸洞)’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미 15세기에 ‘골’이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5세기에 ‘골’이 아닌 [洞]을 뜻하는 또 다른 어형이 존재하므로 [谷]의 ‘골’이 그대로 [洞]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15세기의 ‘조, 스’에 보이는 ‘’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이 ‘고을’로 이어져 줄어진다면 ‘골’이 가능하다. 의미 면을 따진다면 마을 명칭의 ‘골’은 [谷]의 그것보다 ‘고을’로부터 축약된 ‘골’과 더 밀접하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골’계 지명은 [谷]을 의미한 데서 연유한 것과, ‘고을’이 축약된 것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이돈주:1971, 강병륜:1990). 아마도 계곡 명칭과 마을 명칭이 동일한 경우의 ‘골’은 본래 [谷]의 ‘골’로부터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예컨대, 절골(谷)/절골(洞), 뒷골(谷)/뒷골(洞), 피아골(谷)/피아골(洞) 등에서 보이는 마을 명칭에 이용된 ‘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구별이 쉽지 않다. 이 경우의 ‘골’은 [谷]에서 출발하여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완전히 굳어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을’의 축약형으로서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굳어진 것일 수도 있다. 후자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보았듯, 2음절 후부 요소는 지명 형성의 특수한 환경에서 1음절로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들 수많은 마을 명칭에 결부된 ‘골’의 기원을 하나하나 찾는 작업은 별 의미가 없다. 이러한 작업보다는 이것이 마을 명칭을 형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구성 요소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의 ‘골’은 때로 ‘굴, 꿀’, ‘울(올)’ 또는 ‘흘’로도 나타난다. ‘골’이 ‘굴, 꿀’로 나타나는 것은 별 설명이 필요없지만, ‘흘’이나 ‘울’로 나타나는 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흘’은 ‘골’의 이른 시기의 형태가 거의 원형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골’과 고구려어 ‘忽’과의 관련성은 더 분명해진다. 부여 지역에서는 ‘모흘’(毛屹) 한 예가 보이는데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형상이다.
  부여 지역에서 발견되는 ‘울’계 마을 명칭은 ‘갈울, 띠울, 새울, 구래울, 가재울, 안재울, 잣재울’ 등이다. 이들 모두는 선행음이 ‘ㄹ’이나 모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음도 대개 과거 이중 모음이던 ‘애, 에’라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고유어를 선행 요소로 하고 있는 점도 눈에 뛴다. 중세 국어에서 [l]이나 [y] 뒤의 ‘ㄱ’은 ‘ㅇ’으로 교체되는데 이들도 바로 그러한 변화 형태들이다. ‘애, 에’ 뒤의 ‘ㅇ’은 이들이 이중 모음이던 시절에 [y]의 영향으로 ‘ㄱ’에서 약화된 것이다. ‘애고개’가 ‘애오개’, ‘배고개’가 ‘배오개’로 실현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똑같은 환경에서 ‘울’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어서 ‘울’이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울’을 신라어 ‘火’, 백제어 ‘夫里’에 소급하는 ‘’(坪)의 변화형(>울)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 개연성은 높지만, ‘울’이 특정 환경에서 주로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谷]에 대응되는 예(가자울)가 있다는 점에서 ‘골’과 연결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골’계 마을 명칭은 출현 빈도가 대단하지만 그 구조도 다양하다. 선행 요소가 고유어는 물론 한자어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1음절과 2음절의 대등한 비율을 이루고 있으며 3음절도 몇 개 보이고 있다. 1음절 고유어에는 ‘절, 띠, 샘, 숯, 범, 뒤, 개, 방(<밤)’ 등이, 2음절 고유어에는 ‘대숲, 바랑, 모시, 구레, 불무, 마루 큰터, 피아’ 등이 이용되고 있는데 명명의 동기도 다양하다. ‘방골’은 ‘밤’(栗), ‘바랑골’은 ‘벼랑’(崖), ‘마루골’은 ‘마루’(宗), ‘피아골’은 ‘피밭’과 관련된 명명이다.
  이들 명칭에도 전래되는 유래가 있는데 몇 개 소개해 보기로 한다. ‘가재골’(태양리)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가재가 줄어들고 까치가 많아져 ‘까치골’로 개칭되었다 한다. 그러나 ‘가재골’의 ‘재’는 [峴]의 그것이 아닌가 한다. 가중리의 ‘가재울’, 장벌리의 ‘장재울’은 마을이 고개 밑에 있기 때문에 이곳의 ‘재’는 분명 [峴]을 지시한다. ‘오양골’은 마을 앞산이 소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하나‘오얏골’과 관련 있지 않나 한다. ‘오래골’은 ‘오래벼’를 많이 삼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오래’가 ‘오동나무’이므로 그것과 관련된 명칭으로 보아야 것이다. 그 지역을 달리 ‘梧坪’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두므골’은 두 줄기 물이 합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이곳의 ‘두므’는 ‘두 물’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듬(뜸)’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도팍굴’은 근처에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이렇듯 전부 요소의 유연성이 상실되면 민간 어원적인 엉뚱한 지명 유래가 자리를 잡는다. 이들 잘못된 지명 유래를 바로잡는 일도 지명 연구가 떠맡아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2.1.4 기

  부역 지역에는 ‘기’계 마을 명칭이 얼마간 존재한다. 다음이 그 예이다.
(10) a. 북새기(北石): 내리
가실기(佳束里): 가탑리
드메기(등너머. 豆木里): 시음리
동내기: 하황리
b. 지루지(地隅): 저동리
밧간디(田中村): 저동리
홧디(花岩): 화성리
마르디(宗北): 증산리
  위의 마을 명칭에 결부된 ‘기’, ‘디’가 동류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의 ‘기’는 아주 이른 시기까지 소급하여 논의되어 왔다. 백제 지명에 자주 등장하는 ‘己, 支, 只’를 이것의 기원형으로 간주해 온 것이다. 이들 차자는 [城]과 빈번히 대응되어‘기’가 [城]을 뜻한 백제어일 가능성이 여러 차례 제시된 바 있다(신태현:1958, 백병채:1968, 이기문:1972). 그리고 ‘지’를 ‘기’의 구개음화 형태로 보기도 하고(백병채:1968), ‘기’보다 ‘디’를 그 원체로 삼고 ‘기’를 ‘디’의 전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양주동, 1942:570).
  물론 ‘기’를 백제어 아닌 한계어로 확대해서 보는 견해도 있고(김주원:1982), ‘기’를 단순한 명사 형성 접미사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이병선:1982, 강병륜:1990).11) 접미사 ‘-기’의 전체 분포를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일반 접미사에 불과한 ‘-기’가 지명 생성에 참여하여 지명의 핵심어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일견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부여 지역에 남아 있는 ‘기’형 마을 명칭의 ‘기’가 백제어 ‘기’에 소급하는지 분명하지 않더라도, ‘기’가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의 기능을 분명히 하는 상황에서는 의미상 그것과 연결시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예문(10)b의 ‘밧간디’에서 보듯12) ‘기’는 아니지만 ‘디’가 [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약 ‘기’가 [城]의 의미로부터 출발한다면, [城]에서 [村]으로의 의미 변화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아마 성안에 마을이 있고, 따라서 성 자체가 마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城]을 뜻한 ‘기’가 [村]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는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쓰이면서 [村]의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예에서 보듯 ‘기’, ‘디’의 선행 음절은 모음이나 유성 자음인 것이 특징적이다. 선행 음절이 모음인 경우는 말음절이 ‘기’가 아니라 ‘이’일 가능성도 있으나 사실상 판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 ‘기’에 선행하는 마을 명칭의 전접 요소는 2음절이 대부분인데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드메기’의 ‘드메’는 ‘듬’ 또는 ‘드매’과 관련될 것으로 보이는데 ‘드메기’는 ‘등너머’라고도 하여 ‘곱절 북쪽 등 너머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르디’에 대해서는 ‘마르’를 ‘마르-’(乾)로 보고 처음에는 땅이 메마르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가 후에 萬戶의 家戶가 설 자리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곳의 ‘마르’는 ‘’(宗)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북새기’는 ‘北石’이라고도 한다는데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 하나 믿기지 않는다. ‘함디’를 ‘華陰基’가 변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의심스럽다. ‘지루지’는 마을의 지세가 바지게 형국이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2.1.5 실

  부여 지역에는 ‘실’계 마을 명칭도 다수 보인다. 다음이 그 예들이다.
(11) a. 참실(眞谷): 내곡리
옥실(玉谷): 옥곡리
b. 삼바실(麻田谷): 마전리
닥바실(涼田): 거전리
만자실(晩者室): 율암리
배미실(船岩): 복덕리
옥가실(玉佳谷): 가곡리
마차실(麻釵谷): 가화리
안추실(蔬谷): 정동리
가느실: 상천리
  본래 ‘실’은 ‘골’과 같이 [谷]의 의미를 띠던 단어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권덕규(1929)에서 지적된 바 있고, 이희승(1932)에서는 ‘실’을 후부 요소로 하는 실제의 속지명이 제시된 바 있다. 따라서 ‘실’계 마을 명칭은 계곡의 명칭이 그대로 마을 명칭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 지역의 ‘실’계 마을 명칭이 ‘谷’과 대응되어 있는 사실도 그러한 추정을 지지한다. ‘참실’이 ‘眞谷’, ‘옥실’이‘玉谷’, ‘삼바실’이 ‘麻田谷’,‘매까실’이 ‘梅谷’ 등으로 차지되어 쓰이고 있다.
  ‘실’에 선행하는 전접 요소는 1음절보다 2음절 어사가 훨씬 많다. 그리고 2음절인 경우 그 전접 요소의 말음절은 모두 모음으로 끝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 접미의 독특한 성향을 암시하는 듯하나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으로서는 잘라 말하기 어렵다.
  ‘실’계 전접 요소는 대부분 그 어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삼바실’과 ‘닥바실’의 그것은 ‘삼밭’(麻田), ‘닥밭’(涼田)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두 번째 음절 ‘바’는 ‘밭’의 ‘ㅌ’ 탈락형에 불과하다. 이들은 각각 ‘닥나무’와 ‘삼밭’이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다. ‘옥실’은 ‘玉’이 많이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분명하지 않다.
  다른 지역(예컨대, 충북)에서는 ‘실’이 ‘일’로도 나타나고 있으나(예. 하일, 모내일) 부여 지역에서는 ‘실’로만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실’은 마을 명칭으로 주로 사용될 뿐 계곡 명칭으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계곡 명칭은 ‘골’계가 대부분이다.


          2.1.6 뫼(메, 매, 미)

  부역 지역 마을 명칭에는 ‘미, 메, 뫼’ 등이 후접된 예들도 상당히 발견된다. 이들은 중세 국어 ‘뫼ㅎ’과 관련되므로 함께 묶어 논의할 수 있다.13)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2) a. 능메: 능산리
배매(바매. 所迡山): 동사리
솔매(松山): 청송리
닭메(鷄山): 청포리
중미(中美. 中山): 대양리
말미(馬山): 초평리
걸메(杰山): 반산리
큰뫼: 대덕리
소매(牛山): 동사리
b. 소반뫼(盤山): 반산리
소새미: 송곡리
남살미(南山里): 동남리
구수메(玉山): 비당리
지정매: 점리
시루미: 시음리
두루미: 군수리
나르메(羅山): 두곡리
부웡메: 비정리
지정매: 점리
거그매(龜山): 토정리
두집매: 신대리
부엌메: 상천리
여수매(여매): 간대리
  ‘메, 매, 미, 뫼’ 중 앞의 세 가지 형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뫼’형은 많지 않다. ‘용비어천가’에 ‘미, 메’는 나타나지 않고 ‘뫼’형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강병륜(1990)은 ‘미, 메’는 음운 변화의 결과 후기 중세 국어 이후에 만들어진 형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 37 ‘昆湄縣, 汝湄縣, 澮湄’의 ‘湄’가 앞의 ‘미’와 같은 것이라면 이러한 추정한 온당하지 않다. 그리고 ‘미’가 [水]를 뜻하는 고구려어 ‘買’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미’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기란 수월하지 않다. 부여 지역 마을 명칭에서 [水]와 관련될 만한 ‘미’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이 ‘미, 메, 매’등은 [山]을 뜻하는 ‘뫼ㅎ’과 관련되지만, 산 명칭보다는 마을 명칭에 우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은 전부 요소로 1음절 내지 2음절의 고유어나 한자어를 제한 없이 취하고 있다. 그 전부 요소 중 ‘陵, 솔(松), 닭(鷄), 中, 부웡, 시루(甑), 小盤’은 그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나 ‘남살, 소새, 구수, 나르, 지정, 거그’ 등의 정체는 확실하지 않다.
  ‘소반뫼’은 마을 산이 소반 형태, ‘시루미’는 그것이 ‘시루’ 형태, ‘닭메’는 그것이 ‘닭’의 형태를 띠어 붙여진 이름일 것이므로 ‘미, 메’의 전접 요소로는 산의 형상을 나타내는 말들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시루미’가 시음리에도 있고 증산리에도 있는데 전자의 ‘시루미’는 뒷산이, 후자의 ‘시루미’는 앞산이 시루처럼 생기어 붙여진 명칭이라는 점이다. 전자의 ‘시루미’는 ‘時音’으로 음차되어 ‘時音里’라는 엉뚱한 명칭을 만들어 냈다.
  고유어인 ‘미, 메, 매’만 마을 명칭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고 한자어 ‘산’도 마을 명칭에 이용된다. ‘역구산(족교리), 옥산(전장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산’계 마을 명칭은 그리 흔하지 않다.


          2.1.7 안

  부여 지역의 마을 명칭에 ‘안’계 명칭이 몇 개 보이고 있다.
(13) 방죽안: 동방리. 죽절리
연당(蓮塘)안: 비당리
병목안(金南): 가화리
정주안(亭株內): 토정리
  이 ‘안’은 [內]의 그것인데 마을 명칭의 후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그 마을이 선행 요소의 안쪽에 위치함을 지정한다. 대부분의 지명 후부 요소가 자연물과 관련된 명칭이라는 점에서 ‘안’은 그 성격이 독특하다. 이것을 지명의 후부 요소로 간주하더라도 다른 후부 요소와 동일하게 다룰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계 지명은 의미의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 ‘안’에 이어 다른 구체 명사를 후행시키기도 한다. ‘물안곡(오덕리), 솔안들(마정리), 들안뜸(청포리)’ 등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안’의 선행 요소가 1음절일 때만 가능하지 선행 음절이 2음절 이상일 때는 ‘방죽안, 연당안’에서 보듯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아마도 형태상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안’의 선행 요소가 1음절이라 해서 모든 ‘안’이 후행 요소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의 예이지만 ‘골안, 담안, 배안’ 등에서는 ‘안’ 단독으로 쓰이고 있다. 이로 보면 ‘안’이 지명의 후부 요소로 상당한 자격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여 지역에서의 ‘안’은 주로 마을 명칭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연당안’은 앞에 연당이 있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려진 이름이며, 병목안은 형국이 병목의 안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東里의 ‘방죽안’은 밀양 박씨가 방죽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또 방죽에 방개가 많이 살아 ‘艻溪’라고도 한다는데 ‘방계’의 유래 설명은 믿기 어렵다.


          2.1.8 머리

  부여 지역에 ‘머리’계 마을 명칭도 적지 않아 발견된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4) a. 소머리: 마정리
창머리(倉頭): 중정리
들머리(石隅): 석동리
용머리(龍頭): 오량리
말머리(馬頭): 수원리
b. 검은머리: 모리
도구머리: 자왕리
부여머리: 부여두리. 용당리
북두머니(北斗里): 만수리
  이곳의 ‘머리’는 일반 명사 ‘머리(頭)이다. 자연물 명칭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에서 살핀 ‘안’과 같이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는 독특한 것이다. 이 ‘머리’는 대체로 지형이 특정 대상의 머리처럼 불쑥 튀어나온 지역이나 특정 지역으로 들어가는 초입인 지역의 지명에 이용된다.14) ‘소머리, 용머리’의 ‘머리’는 전자에, ‘부여머리, 창머리’의 ‘머리’는 후자와 관련된다. ‘용머리’는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며, 부여두리의 ‘부여머리’는 부여로 들어가는 들머리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당리의 ‘부여머리’에 대해서는 ‘부여’를 ‘부여씨’, ‘머리’를 ‘마을’이 변한 것으로 보고, ‘부여씨의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유래가 전한다.
  이 ‘머리’와 ‘원모(머)루(만사리), 왜마루(칠산리), 민머루(칠산리), 대인마루(초평리)’의 ‘마루’는 그 기원을 같이하지만 지명에서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마루’는 중세 국어 ‘’(宗)로 직접 소급하여, 지명의 후부 요소로는 넓은 평지를 가리킨다.


          2.1.9 -애

  부여 지역에는 ‘-애’를 포함하는 마을 명칭이 있어 주목된다. 다음이 바로 그들 예이다.
(15) 구드래: 구교리
건드래(乾村): 벽룡리
동아새(禿城): 구봉리
  이들 명칭 속의 ‘-애’는 접미사 ‘-애’가 지명의 후부 요소로 사용된 것으로 간주된다.15) 따라서‘-애’는 ‘-이’와 함께 몇 안 되는 접미사 후부 요소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구드래’에 대해서는 ‘구들+-애’ 아닌 ‘구+드래’로 분석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찍이 있었다. ‘구드래’의 ‘구들’이 ‘삼국유사’의 암시처럼 ‘石’이 아니라16), ‘구’(大)와 지격 촉음 ‘ㄷ’, 그리고 ‘을’(王)의 복합어라고 보는 관점에서이다(도수희, 1987). 이러한 관점에서 도수희(1987)에서는 ‘구드래’를 [大王], ‘구드래 나루’를 [大王津], 즉 왕의 전용 나루로 해석하고 있다. ‘구들’의 ‘돌석’설을 부정하는 근거는 백제 시대에 온돌 문화가 부재했다는 결론에서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업적은 이미 백제 초기에 온돌 문화가 존재했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구드래’가 ‘구들’과 무관할지는 모르지만, 백제 시대에 ‘구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구드래’의 어원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구조의 ‘건드래, 동아새’가 있는 이상, 이것을 ‘구들’과 ‘-애’로 분석할 여지는 있다. 여기에 ‘듬’에 대한 ‘드매〉드메’ 또한 이러한 분석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17)
  ‘건드래’에 대해서도 이것이 ‘건들+-애’로 분석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그 어원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18) 동네의 샘이 말라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는 지명 유래에 근거한다면 ‘건(乾)들’, 즉 ‘마른 들’이라고 잠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속단하기 어렵다. 응평리에 ‘건들(乾坪)이 있으므로 그렇게 해석될 가능성은 있다. ‘구드래’의 제2음절이 ‘들’이라고 점에서 ‘건들’의 ‘들’과 모든 연관성이 없나 하는 조심스런 의문이 생긴다. 다른 지역의 예이지만 ‘원드래, 만드레, 먼드래’(遠坪) 등의 ‘들’은 ‘건들’의 그것과 같은 성격임이 분명하다.
  ‘동아새’의 단어 구조와 어원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난다. ‘동아새’를 ‘禿城’이라고도 하므로 ‘독(禿)+잣(城)+-애’로 분석하고 ‘독자새〉동아새’의 과정을 그려 볼 수 있다. ‘동아새’에 대한 ‘동아시’도 있는데 이것은 ‘독(禿)+잣(城)+-이’로 분석되어 ‘동아새’와 접미사 부분에서만 차이를 보인다.
  어쨌든, 지명의 후부에 나타나는 ‘-애’가 접미사라면 ‘-이’와 함께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 매우 독특한 것이다.


          2.1.10 -이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하지만 부여 지역에도 ‘-이’로 끝나는 마을 명칭이 다수 존재한다.
(16) a. 왕안이: 신리
왕안리(旺安里)
쑥댕이: 석우리
숙당리(肅堂里)
대왕이: 왕포리
대왕리(大旺里)
회정이: 가회리
회정리(檜亭里)
군문이: 귀덕리
군문리(軍門里)
사랭이: 산산리
사랑리
설젱이: 벽룡리
설정리(雪亭里)
궁영이: 송국리
국영리(國令里)
쇠판이(서편이): 화수리
서편리(西便里)
b. 쇠정이: 무정리
쇠정
꾀까리: 갈산리
고갈
금강이: 경둔리
금강이
c. 장승배기: 구교리. 태양리
바위배기: 동사리
소쟁이(소정이. 松亭): 석목리
소반챙이(小盤村): 비당리
비아쟁이: 만사리
노루목쟁이(獐項, 黃山): 홍산리
  이 ‘-이’는 명사 파생의 생산적인 접사인데 지명의 후부에 연결되어 단어 형태의 안정에 큰 기여를 한다. ‘-이’는 (16)b에서 보듯 독자적 기능을 갖는 2음절 지명에 덧붙어 안정성 명사화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계 마을 명칭은 (16)a에서 보듯 ‘리’계 마을 명칭과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자가 단지 형태의 안정을 위해 고려된 것이라면, 후자는 마을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미론적 시각이 고려된 것이다. 따라서 ‘-이’계의 마을 명칭은 2음절 지명, ‘-이’계 지명, ‘리’계 지명의 순서로 조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음절 지명이 형태 구조상 불완전하자 ‘-이’계 지명을, ‘-이’계 지명의 의미가 불확실하자 ‘리’계 지명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는 지명의 후부 요소로서의 자격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지명의 말미가 ‘-이’로 끝난다고 해도 ‘장승배기, 바위배기, 소쟁이, 소반쟁이, 노루목쟁이, 설젱이, 대쟁이, 씀부쟁이, 높은댕이, 쑥땡이, 계룡댕이, 홍탱이’ 등의 ‘-이’는 앞에서 살핀 ‘-이’와 다른 각도에서 다룰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 마을 명칭에서는 그 후부 요소를 ‘-이’ 아닌 ‘-배기, -쟁이, -댕이’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박-, 정(亭), 대(臺)’에 ‘-이’가 붙은 것이지만, 이미 그것 자체로 지명의 후부 요소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쟁이, -댕이’의 경우는 ‘-이’가 선행 음절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 낸 독특한 어형이다. ‘-이’자체가 지명의 후부 요소로 굳어지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것이 독특한 지명의 후부 요소를 만들어 내는 것도 특이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안이’(염창리)는 羅城 안에 있는 마을이어서, ‘신배정이’(전장리)는 큰 아가배나무(신배나무)가 정자를 이루었다 하여, ‘닷전모렝이’(남촌리)는 금강에서 새우젓을 실은 배가 이곳까지 거슬러 와 닷줄을 매어단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앞에서 제시한 후부 요소 이외에 부여 지역의 마을 명칭에 이용되고 있는 다른 후부 요소도 상당히 많다. ‘터, 고개, 바위, 티(峙), 내(川), 다리, 절(寺), 재, 펄, 새, 샘, 밭, 사리, 개, 점(店), 편(便), 돌’ 등이 그들이다. ‘절(寺), 점(店)’ 등을 빼놓고는 거의 자연물 명칭이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이들은 다른 지명의 후부 요소로부터 마을 명칭에 전용된 것이므로 부차적 성격을 띤다. 이들은 대체로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완전히 굳어지지 못하고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여 지역의 마을 명칭에는, 특정 후부 요소를 포함하는 것 이외에 후부 요소와 관계없이 만들어진 일반 단어형 명칭들도 있다. ‘당너머(나복리), 여울(내리), 나룻가(진변리), 한우물(합정리), 서낭당(중정리), 강가(반조원리), 소바리(수고리), 고갈(갈산리), 버들(은산리), 내건너(군사리), 밤동산(군사리), 누룩구석(군사리)’ 등이 그들이다. 3음절 이상일 경우에는 지명의 단어 구조상 구체적인 마을 지시어가 붙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2.하천 명칭

  부여 지역의 하천 명칭에 이용된 후부 요소는 ‘개’와 ‘내’가 일반적이다.
(17) a. 가징개(光之浦): 상금리
화징개: 화수리
b. 검지내(玄溪): 점리
마내(旺浦川.馬川): 능산리
빼내(秀川): 석우리
쇠내(金川. 왕구리내): 금지리. 상기리
수랑내(丹亭川): 현암리
오목내: 지석리
부꾸내(北仇川): 북고리
c. 갓개내(笠浦川): 가신리
d. 수왕물: 군사리
  위의 예에서 보듯 하천 명칭의 후부 요소로 ‘내’가 가장 일반적이다.19) 이 ‘내’보다 ‘개’는 빈도에서는 현격히 떨어지지만 더 고형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개’는 ‘삼국사기’지리지의 ‘黔浦縣-金浦縣, 寺浦縣-藍浦縣, 推浦縣-密浦縣’의 예에서 보듯 매우 이른 시기부터 쓰인 것으로 보인다. 중세 국어에서도 ‘합개(合浦), 김곡개(金谷浦), 개(助邑浦), 얌개(蛇浦)’에서 보듯 상당수 발견된다. ‘개’가 ‘내’보다 고형일 것이라는 사실은 (17)c의 ‘갓개내’를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갓개내’는 ‘갓개’에 ‘개’의 동의어 ‘내’가 연결된 동의 중복 형태이다. 이러한 동의 중복 형태가 만들어진 것은 ‘개’의 지시 의미가 약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약화된 지시 의미를 보강하기 위해 같은 의미의 ‘내’를 첨가시켰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렇듯 ‘내’가 ‘개’의 대체 형태라면 ‘개’가 더 고형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개’계와 ‘내’계 아닌 하천 명칭에 ‘수왕물’이 있다.
  이들 부여 지역의 하천 명칭은 거의 마을 명칭으로 전용되어 ‘개’계와 ‘내’계의 마을 명칭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8) a. 무개: 청포리
갓개: 입포리
뒷개(北浦): 쌍북리
시름개: 시음리
화중개(化中開): 화수리
동녘개: 입포리
b. 빼내: 석우리
마내(마래): 동남리
다부내: 논티리
서우내: 운티리
거무내: 관북리. 쌍북리
너벅내: 홍산리
무루내(水區洞): 홍량리
너봉내: 홍산리
가르내: 토정리
가릇내: 토정리
  위의 예에서 보면 ‘내’의 선행 요소는 2음절인 경우 고유어가 많은데 이들은 대개 동사나 형용사이다. ‘거무내’(玄川, 黑川)는 [검는 내]이므로 ‘거무’는 ‘검다’와, 너벅내, 너봉내‘(洪川, 廣川)는 [넓은 내]이므로 ‘너벅, 너봉’은 ‘넓다’와, ‘가르내, 가릇내’는 [가르는 내]이므로 ‘가르, 가릇’은 ‘가르다’(分)와 관련된다. 즉, ‘내’의 선행 요소는 내의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2.3 산 명칭

  부여 지역의 산 명칭에는 고유어 ‘뫼, 재’계와, 한자어 ‘봉, 산, 티(峙)’계가 있다. 이 중 ‘뫼’계가 가장 일반적이다. 그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19) a. 소반뫼(盤山): 반산리
중미(中山): 대양리
그절미: 중정리
b. 도무재(蔚城. 岑嶺): 신리. 합정리.
바위재: 초평리
재주재: 송학리
징판재: 송학리
매봉재: 홍산리. 탑산리
바위재: 초평리
c. 매봉(鷹峯): 봉정리
갈뫼봉: 상촌리
두리봉(周峯): 청남리. 오덕리
달기봉: 학산리
지네봉: 학산리
꾀갈봉: 갈산리
감투봉: 신암리
각시봉: 남촌리
자라봉: 토정리
우렁봉: 합곡리
d. 마가산(馬駕山. 莫芽峙): 충화면. 옥산면
부엉이산(매봉): 구봉리
침산(砧山): 주정리
일곱메산(송장산): 현암리
안산: 송학리
용머리산: 현북리
꽃산: 청송리
꼬부랑산(馬駕山): 가덕리
강막을산: 석동리
퇴봉산: 토정리
원퉁산: 안서리
때깨산: 반교리
들봉산: 반교리
e. 마가티(馬駕山): 가덕리
f. 노적만이: 전장리
왕재말랭이: 진호리
  ‘뫼, 미’는 [山]을 뜻한 고유어로서 대단히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다(앞의 2.1.6.참조). 앞에서 보았듯 부여 지역에서 이들은 산 명칭보다는 마을 명칭에 월등히 많이 나타난다. 부여 지역의 산 명칭은 ‘봉’계와 ‘산’계가 고유어계보다 훨씬 우세하다. ‘일곱메산’에서 보듯 ‘메’는 산 명칭은 후부 요소로서의 기능을 ‘산’에 넘겨준 징후가 뚜렷하다. ‘들봉산’에서 보듯 ‘봉’ 또한 ‘산’에 그 기능을 빼앗기고 있다.
  ‘재’계 산 명칭은 다른 자연물의 명칭에서 왔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하다. ‘재’는 본래 [峴, 嶺]은 물론 [城]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단어인데 지금은 [峴, 嶺]의 의미로만 쓰이고 있다. 산에는 여러 고개가 있기 마련이므로 그 산을 대표할 만한 고개 이름이 산의 명칭을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산’에 대한 ‘마가티’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산 명칭의 전부 요소에는 대체로 ‘갈모, 시루, 주걱, 소반, 매, 지네, 자라’ 등과 같이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어사가 많다. 그리고 ‘꼬부랑, 두르(圓), 강막을’ 등과 같은 특정 형상을 나타내는 어사가 오기도 한다.
  (19)f에서 보듯 산 명칭과 관련된 후부 요소를 갖지 않는 독특한 명칭들도 눈에 뛴다.


      2.4 고개 명칭

  부여 지역에 많은 고개 명칭이 존재한다. ‘재’계, ‘티’계, ‘고개’계가 대부분이며 ‘현’계도 얼마간 보인다.
(20) a. 게재(蟹峙): 온해리
질마재: 운티리. 청남리
바랑재: 희동리
소금재: 갈산리
피앗재: 만수리
숲부재: 석성리
숨은재: 벽룡리
빙곳재(빙고재): 구교리
백충재(바충재. 팔충티. 백성재. 백충티): 천당리
여수골재: 내성리
톱밥굴재: 벽룡리
시루산재: 족교리
까치나무재: 석성리
누런개재: 가화리
누루개재: 가화리
외트래미재: 가화리
b. 목티: 주정리
안티(鞍티. 질마재): 온해리
조티: 나령리
지티(芝티): 갈산리
한티(漢티. 한고개): 군사리
역티(驛티): 점리
묘티(貓티): 점상리
솔티(솔고개): 만지리
태티(탯고개): 오덕리
굴재티: 석동리
나발티(發溫티. 발온재): 나령리
이목티(梨木티. 배남정이고개): 점리
이목티(배나무재): 원문리
바리티: 점상리
백충티(百忠티. 백충재): 천당리
덕림티(德林티. 덕림고개): 팔충리
마가산티(마가산고개): 대선리
c. 큰고개: 논티리. 금사리
먹고개(木티): 주정리
돌고개: 금암리
밤고개(방고개. 배암고개. 栗티): 율암리
꽃고개: 석성리
배고개: 비당리
언고개: 가회리. 운티리
갓고개: 동사리. 교원리
방고개: 수신리
한고개(한티): 군사리
탯고개(태티): 오덕리
솔고개(솔티고개. 송고개. 松峴. 송티): 만지리
낫고개: 상천리
덧고개: 토정리
황토고개: 태양리
가루고개: 수목리
지티고개: 지티리. 대덕리. 갈산리
달마고개: 천보리
삽티고개: 천보리
보리고개: 동남리
거북고개: 석목리
군들고개: 염창리. 중정리
배고개: 비당리
사창고개: 석성리
지경고개(지경티): 정각리
전등고개: 증산리
술둑고개: 반조원리
새울고개: 청포리
뱀터고개: 입포리
새재고개: 화성리. 나령리. 조현리
가낙고개: 가곡리
옥실고개: 옥곡리
안장고개(鞍峴): 점리. 점상리
바늘고개: 지토리
건평고개: 세탑리
신암고개: 신암리
노초리고개: 반산리
아리랑고개: 반산리
마가산고개(마가산티): 대선리
희여티고개: 현북리
갓재미고개: 암수리
외트래고개: 족교리
부시티고개: 대덕리
노루목고개(獐項峴): 장항리
늦인목고개: 지선리
비지재고개: 경둔리
매산굴고개: 점리
국사당고개: 석동리
만인재고개: 홍량리
배남정이고개(梨木티): 점리
대문다리고개: 원문리
아홉사리고개: 토정리
d. 영현(英峴. 영고개): 발산리
안현(鞍峴): 점리
송현(松峴. 솔고개. 솔티): 만지리
e. 규암서낭당이: 규암리
  ‘재’는 [嶺,峴]의 의미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이 고개 명칭의 후부에 생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부여 지역 고개 명칭에도 ‘재’계 명칭이 다수 존재한다. 이 ‘재’계 명칭은 ‘티’계 명칭과 공존하기도 한다. ‘발온재/발온티, 백충티/백충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티’계와 ‘고개’계와의 공존만큼 많지는 않다. ‘재’계와 ‘고개’(마가산재/마가산고개), ‘재’계와 ‘현’계(약정재/약정현), ‘고개’와 ‘현’계(영고개/영현)의 공존 예도 있으나 이들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재’계는 ‘티’계로 차자되어 존재하기도 한다. ‘까치나무재/鵲티, 질마재/鞍티, 새재/鳥티, 게재/蟹티, 배나무재/梨木티’ 등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재’계 명칭은 다시 ‘고개’가 덧붙여 확장되기도 한다. ‘새재고개, 비지개고개, 만인재고개’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러한 의미 중복형은 ‘재’의 의미 기능이 약화되면서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배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재’는 그 의미 기능이 약화되면서 일반 명사로뿐만 아니라 고개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도 기능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경우이든 그 기능을 ‘고개’가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재’계 명칭은 마을 명칭에 전용되어 사용되기도 하는데 위에 제시한 많은 고개 명칭이 마을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일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21) 성재(城山): 신성리
게재(蟹티): 온해리
질마재(鞍티): 운티리
빙고재: 구교리
까치나무재: 석성리
  부여 지역 고개 명칭에 ‘티’계 지명도 다수 발견된다. 본래 이 ‘티’는 한자 ‘峙’인데 ‘치’아닌 ‘티’로만 실현되고 있다. ‘티’계 고개 명칭에는 ‘재’계 명칭에 대한 차자 대응형이 있으며(앞의 예문 참조), 다수가 ‘고개’형과 공존하기도 한다. ‘마가산티/마가산고개, 솔티/솔고개, 태티/탯고개, 덕림티/덕림고개, 목티/먹고개, 지경티/지경고개’ 등이 이들이다. 이렇듯 ‘티’계와 ‘고개’계가 공존하는 사실은 ‘티’의 ‘고개’로의 대체 현상을 말하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티’의 의미 기능이 약화되고 ‘고개’가 고개 명칭의 후부 요소로 부상하면서 ‘티’의 ‘고개’로의 대체가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티’의 의미 기능 약화와 ‘고개’의 의미 기능 강화는 ‘지티고개, 삽티고개, 희여티고개’와 같은 ‘티’가 선행하고 ‘고개’가 후행하는 동의 중복형 고개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티’계와 ‘고개’계가 동시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티’형은 고개 명칭은 물론 마을 명칭에서도 다수 발견된다. 다음 예가 그러한 것들이다.
(22) 논티: 논티리
마리티: 증산리
발티: 장하리
잣티: 지토리
삽티: 상천리
고이티: 점상리
  ‘고개’형은 현재 고개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 가장 생산적이다. 100개가 넘는 고개 명칭이 존재하고 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재’, ‘티’계와 공존하면서 그 대체어적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재’, ‘티’의 의미 약화를 보강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개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 대표성을 완전히 얻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후부 요소 ‘고개’가 취하는 선행 요소는 형태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매우 다양하다. ‘고개’ 앞에는 1음절, 2음절은 물론 3음절 이상의 어사도 위치한다. 특히 2음절 어사가 많은데 그것은 2음절인 후부 요소 ‘고개’와의 형태론적 안정성을 고려한 배려로 볼 수 있다. 1음절 전접 요소는 ‘큰, 먹, 돌, 배, 밤, 꽃, 언, 한, 갓, 낫, 덧’ 등 대부분 고유어라는 특징을 보이는데 주로 고개의 형상과 상태를 나타내는 어사이다. 2음절 전접 요소도 ‘질마, 보리, 군들, 새울, 뱀터, 술독, 가루, 거북’ 등의 고유어가 우세하나 ‘황토, 전등, 사창, 국사당, 건평, 안장’ 등의 한자어도 보인다. 이들은 고개의 모양, 상태, 지질 등 다양한 의미를 지시한다. 3음절 이상의 전접 요소에는 ‘노초리, 아리랑, 희여티, 갓재미, 외트래, 부시티, 노루목, 비지재, 소금쟁이, 대문다리, 마가산, 만인재’ 등이 있는데 고유어와 한자어가 함께 보이고 있다.20)
  ‘고개’는 고개 명칭뿐만 아니라 마을 명칭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23) 먹고개: 주정리
돌고개: 금암리
밤고개: 율암리. 수신리
언고개: 가회리
갓고개: 동사리
안장고개: 점리

      2.5 골짜기 명칭

  부여 지역의 골짜기 명칭은 거의 ‘골’계이며 ‘실’계로 간혹 나타난다.
(24) a. 절골: 쌍북리. 운티리
뒷골: 청포리
뒷굴: 전장리
속골: 청포리
진골: 벽룡리
큰골(치덕굴): 중정리
온골: 수고리
밤골: 논티리
작은골: 수암리
고든골: 만수리
절텃골: 모리
닥박골: 송암리
징판굴: 송학리
때재골: 쌍북리
칙덕굴(큰골): 중정리
소롱골: 비당리
병소골: 석성리
망앗골: 귀덕리
성냥굴: 장산리
여수골: 내성리
산적골: 초왕리
오양골: 내대리
뒷동골: 상기리
피앗골: 만수리
우주골: 반교리
접싯골: 반교리
서당골: 장항리
불뭇골: 전장리
여내골: 전장리
오얏골: 석동리
호짝굴: 회동리
됨박골: 만지리
패랭이골: 규암리
암수암골: 주암리
소금잿골: 갈산리
소리개골: 가곡리
사기점골: 석동리. 원문리
b. 구실: 장항리
아랫구실: 장항리
윗구실: 장항리
c. 정사래: 송정리
  앞에서도 보았지만(2.1.3) ‘골’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된 [谷]을 뜻하는 단어이다. 부여 지역의 계곡 명칭은 거의 ‘골’계인데 이형태 ‘굴’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골’의 이형태라고 추정한 ‘울(올)’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21)
  위의 예에서 보듯 ‘골’에 선행하는 전접 요소에는 1음절, 2음절, 3음절 어사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1음절 전부 요소는 대부분 고유어로 위치나 상태를 지시한다. 2음절 전부 요소는 고유어와 한자어가 대등하게 섞여 있는데 대체로 모양이나 지역을 나타낸다. 한편, 3음절 전부 요소는 대부분 고유어로 특정 지역을 지시한다.
  이들 ‘골’계 지명은 골짜기의 명칭으로서뿐만 아니라 마을 명칭으로도 매우 활발히 사용된다(2.1.3 참조). ‘골계’와는 달리 ‘실’계 명칭은 부여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을 명칭에 이용된 ‘실’계 명칭이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앞의 2.1.5 참조) ‘실’계 계곡 명칭도 다수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래’는 계곡 명칭의 후부 요소로 매우 독특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 국어 ‘래’(이랑)에 소급한다.


3. 마무리

  우리는 지금까지 부여 지역 마을, 하천, 산, 고개, 골짜기를 지시하는 고유어 계통의 명칭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여 지명에 백제어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부여 지명의 전반적 특징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거의 기대감 이상의 성과를 얻지 못한 느낌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백제어적 요소라고 지적한 내용만 다시 확인하는 선에서 더 이상 앞서 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명에 등장하는 어사의 많은 부분이 중세 국어나 현대 국어, 아니면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 흔히 발견되는 어사가 주가 되고 있어서 그러하겠지만, 고유성을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명의 전부 요소에 대한 전반적 해석이 여의치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부여 지명의 독특한 특징을 들어서 백제어의 흔적을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언급된 사실을 정리하여 결론으로 삼기로 한다.
  (가)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부여 지역에서도 마을 명칭은 상당히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후부 요소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과 같다. 마을을 지시하는 후부 요소에는 ‘말, 뜸’과 같은 본질적인 것도 있지만, ‘골, 실, 뫼, 고개, 터, 재, 다리, 재, 개, 안, 머리, -애, -이’ 등과 같은 부차적인 것도 있다. 부차적인 후부 요소는 자연물 명칭, 일반 명칭, 접미사 등으로 분류되나 자연물 명칭이 대부분이다. 마을 주변에 산재해 있는 자연물을 지시하는 명칭이 그대로 그 마을 명칭이 되고 그것이 세력을 얻으면 특정 자연물 명칭의 후부 요소가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선택될 수 있다.
  (나) 마을 명칭의 본질적 후부 요소 중 ‘뜸’은 백제어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듬’(圓)으로 소급할 수 있는데 백제권인 전남·충남 지역에서 유독 많이 발견된다. 부여 지역에서는 ‘뜸’으로만 나타나고 있어 분포의 정연성을 보여 준다.
  (다) 부여 지역에서 ‘말’은 마을 명칭의 대표적 후부 요소로 기능을 한다. 이것은 ‘’ 또는 ‘마을’로부터 출발하여 매우 이른 시기에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라)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로서 ‘골’과 ‘실’은 본래 [谷]을 지시하는 골짜기 명칭의 대표적 후부 요소이다. ‘골’은 이것의 선행 어형 ‘홀’(忽)로도 나타나 고구려어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골’은 ‘〉고을’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있어서 마을 명칭의 후부 요소 ‘골’은 이들 두 방향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골’의 이형태로 ‘굴, 꿀, 울’ 등이 나타나는데 이 중 ‘울’과의 연계는 분명한 것은 아니다. ‘실’은 현재 골짜기 명칭에서보다 마을 명칭에서 더 큰 흔적을 남기고 있다.
  (마) 자연물 명칭 중 ‘뫼(미, 메), 고개’ 등도 마을 명칭으로 빈번히 전용된다.
  (바) 지명에 결부된 ‘기’는 이전부터 백제어로 이해되어 왔는데 부여 지역 마을 명칭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제시된 예들의 ‘기’가 모두 동류의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사) 마을 명칭의 후부에 나타나는 접미사 ‘-애’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다른 여러 지역을 더 참고해 보아야 하겠지만, ‘-애’계 마을명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특히 발달한 형태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그러나 ‘-애’를 설정한다 해도 ‘구드래’에 대한 어원 설명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아) 하천 명칭의 대표적 후부 요소는 ‘개’와 ‘내’다. ‘개’가 ‘내’보다 고형일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개’형보다 ‘내’형이 훨씬 우세하다.
  (자) 산 명칭에는 ‘뫼, 재, 봉, 산, 티’ 등의 비교적 다양한 후부 요소가 결부된다. 이 중 ‘뫼’가 본질적 요소이나 지금은 ‘산’과 ‘봉’만큼 우세하지 못하다. 이것도 마을 명칭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차) 고개 명칭의 후부 요소에는 ‘재, 티(峙), 고개’가 있다. 이들은 본래부터 [嶺, 峴]을 뜻하는 독자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동일 고개 명칭에서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재’계와 ‘티’계, ‘티’계와 ‘고개’계의 공존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들은 한 명칭에 같이 배열되기도 한다. ‘재’와 ‘티’가 선행하며 ‘고개’가 후행한다. 공존 양상이나 배열 순서로 보아 ‘재’는 ‘티’로, ‘티’ 또는 ‘재’는 ‘고개’로 대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 골짜기 명칭에는 ‘골’과 ‘실’이 후부에 연결되나 ‘골’이 대부분이며 ‘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들‘골’과 ‘실’은 마을 명칭에 적극적으로 전용된다.
  지명에는 앞에서 살펴본 마을 명칭, 하천 명칭, 산 명칭, 고개 명칭, 골짜기 명칭 이외에도 터 명칭, 들 명칭, 보 명칭, 나루 명칭 등이 더 있으나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모두 다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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