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의 지명]

지명 연구의 새로운 인식

도수희 / 충남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地名의 定義

  사람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이름을 소유한다. 그 하나는 개개인에게 지어 준 人名이며, 다른 하나는 곳곳에 명명한 地名이다.
  사람은 地上에서 태어나 한 생애를 땅 위에서 살다가 다시 지하에 묻힌다. 이처럼 땅과 사람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숙명적인 인연으로 사람은 지상의 한 地域에 정착하여 그곳을 무대로 한 생애의 삶을 전개하게 된다. 좁게는 한 사람의 생활 터전으로부터 넓게는 인간 집단의 생활 무대, 더 넓게는 한 민족의 생활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의 이름이 곧 크고 작은 지명들이다. 따라서 지명은 인간들의 정착지에 대한 공동적 땅 이름이라 정의할 수도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地球 위에 있는 어느 한 지점 혹은 지역(구역)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하나로 창조된 지구 위에서 우리 인간이 생활하면서 필요에 따라 소유의 선을 긋고 그 나누어진 구역 안의 땅에 붙인 이름이 곧 지명이다. 따라서 地名은 본래 2인 이상의 인간 사이에서 한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구별할 때에 사용하는 공통의 부호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이렇게 명명된 지명은 넓은 곳으로부터 좁은 곳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수로 지구 상에 남게 되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가장 큰 지명은 五大洋 六大洲의 이름이다. 그 다음이 나라의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국가가 영유하고 있는 국토의 이름 그것이 곧 국명인데 이것 역시 地名의 범주 안에 들어 있는 존재다. 대한민국이 다스리는 영토의 범위가 곧 ‘한국’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이 경우도 엄격히 말해서 최대 단위의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구 상에는 국가의 수만큼이나 大地名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은 미합중국이 다스리는 국토의 이름(大地名)이며 일본은 일본국이 통치하는 범위의 국토 지명(國名)이다. 이와 같은 大地名 아래에는 편의상 나누어 놓은 大單位 行政 區域이 있는데 이와 같은 행정 구역 단위의 이름들이 앞의 국명에 버금가는 크기의 땅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50개 state의 이름이나, 중국의 모든 省의 이름도 이에 속한다. 이와 같은 행정 단위의 지명들은 또 다시 행정 구역의 필요에 따라 보다 작은 단위의 구역을 갖게 되고 그 구역의 명칭이 또한 보다 작은 지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을 단위(下部 單位)의 小地名이 존재하게 된 것이고, 나아가서 마을 단위의 갖가지 最小 地名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생활하는 무대로서의 명칭으로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地名이란 이와 같은 정치나 행정 단위의 地域 혹은 區域名으로만 생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시대 누가 지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여타의 지명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무수히 존재한다. 말하자면 江 이름, 山 이름, 내 이름, 나무 이름, 다리 이름, 논 이름, 밭 이름, 산골짜기의 이름들이 고유 지명으로 불리는 때가 많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地名은 나름대로의 체계와 역사성을 갖춘 고유 명사이다. 따라서 일반 어휘들이 生滅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생명체의 특성을 지닌 것처럼 지명도 恣意的 音聲 記号(arbitrary vocal symbols)이면서 사회성과 역사성이 일단 부여되면 마음대로 변개하기 어려운 체계성을 지닌 언어적 사실의 존재인 것이다.
  지명은 한 언어의 어휘 체계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발생할 때에는 그 지역 내의 언어 즉 지역어(혹은 방언)로 창조되며 그것들은 다른 고유어의 음운 규칙에 순응하여 변화하는 보편성도 지니고 있다.


2. 地名의 起源과 發達

  우리 인류는 언제부터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가?
  모름지기 地名은 人名과 같은 우리들의 언어에 속하며, 언어의 어휘 중에서도 가장 자주 사용되는 특수 단어이다. 따라서 地名은 인류의 집단 생활과 동시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기록은 보다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 시기가 아무리 일러 보아야 문자 발생 이전까지는 소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


    2.1 最古의 表記 地名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겨진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地名은 다음 <지도 1>에 표기된 것들이다. 이 <지도 1>은 현재로서는 세계 최고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위의 <지도 1>에서 上, 左下, 右下에 있는 동그라미 안의 楔形文字는 ‘北’(上), ‘西’(左下), ‘東’(右下)을 의미하는 地名이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線으로 표시한 線帶記号는 ‘川’을 의미한다. 복선은 ‘道路’를, 그 복선에 고기 비늘처럼 그려진 鱗形은 ‘丘陵’을 표시한 것이다.
  이 <지도 1>은 B.C 2,500년경에 창제된 楔形文字의 발생 시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後代에 제작된 듯싶다. 이 <지도 1>은 粘土板에 楔形文字를 새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데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토된 것을 현재 미국 Harvad 대학의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2 最古의 地名型

  해양성 열대의 하와이 群島에는 일찍부터 상당수의 인구가 정착하여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많은 地名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와이 인이 도착하기 以前에 메네훈(Menehune)이라 일컫는 先住民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약간의 지명에 접두어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카우아이(Kauai) 섬에서 고대에 건설하였던 ‘메네훈의 堀’을 발견하는데 거기에는 ‘메네훈의 痕迹’(ke-alapii-a-ka-Menehune)이라 하는 것이 있다. 만일 하와이 인보다 먼저 메네훈이 先住한 사실이 틀림없다면 거기에는 그들이 명명한 지명이 잔존하고 있을 것이다. 실로 하와이 군도에는 하와이어(폴리네시아어)로는 풀리지 않는 약간의 地名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앞의 추론을 돕는다. 그에 해당하는 地名 중에 유명한 것이 하와이의 여러 섬에 부여된 여러 개의 地名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各島에 부여된 原初 地名들이 곧 최고의 地名型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하와이 諸島의 대표적 主島들의 이름은 거기에 정착한 최초의 주민에 의해 명명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地名 중에 난해한 反復 語素(repeated elements)는 原始 言語(earlier language) 중 일반 어휘에 소급될 가능성을 지닌 化石과 같은 존재라 할 수도 있다.
  Molokai와 Molokin은 하나의 공통 요소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공통 요소는 ‘島’의 의미일 가능성이 짙다. 거의 비슷한 난해어가 Kahoolawe인데 이것은 ‘나름, 옮김’(the taking away)의 의미이거나, 아니면 ‘바람에 날리는 붉은 먼지’(the red dust blowing)일 것이며, Niihau는 ‘사슬 갑옷으로 몸을 묶다’(bound with haubark)일 것이며, Ohau는 ‘集合場’(gathering place:여기에 하와이 주의 首府가 있음)의 의미이며, Kauai는 ‘메마른 곳’(drying place)이란 뜻일 것이다. 그러나 Hawaii는 폴리네시아 어인 듯이 보인다. 태평양의 諸島 중에서 Havaii, Hawaiki, Savaii라 부르는 語形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와이 인이 명명한 것인데 이 例島 中 최대의 ‘섬’이란 뜻인 듯하다.
  앞에서 소개한 하와이 群島에서와 비슷하게 시베리아에도 그 어말 형태소가 동일형으로 나타나는 江 이름이 많다. 예를 들면, Kebesh Beresh Seresh, Aban, Aban kan, Mana Ana Ona, Basas Unsas Kasas Kumas Arsas 등이 그에 해당하는 江 이름들이다. 지리학자인 쇼스타코비치(Schostakowitisch, 1926~)는 앞의 江 이름들의 동일한 말음절을 ‘江·水’를 의미하는 형태소로 추정하였다. 이어서 그는 시베리아에는 ‘Obj, Aobj, Atobj, Barobj, Sobj, Kobj, Tymkobj’ 등과 같은 江 이름이 수없이 발견되는데 여기서 ‘-Obj’ 역시 ’水·江‘의 뜻을 지닌 형태소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Obj가 단독으로 쓰일 경우에는 Obj 江(시베리아에서 제일 큰 江)이라 하는 것을 보면 그 주장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江 이름은 그 계통이 어느 언어에 속한 것인지를 판명할 수 없다. 이미 소멸하여 버린 어떤 종족의 언어가 남긴 흔적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2.3 한국의 古地名

  한국의 지명도 그 기원이 아주 오래전으로 소급된다. 그것을 표기할 ‘문자’의 借字 혹은 창제가 너무나 늦었기 때문에 비록 그 기록의 시기는 뒤질지언정 그 발생의 시기는 우리의 역사와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외의 역사서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檀君의 立都地의 지명이 ‘阿斯達’(九月山·白岳山)인바 이 지명은 단군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명명한 이름인지 아니면 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는 지명 ‘阿斯達’에 定都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어쨌든 그 기원이 앞에서 소개한 <지도 1>의 지명에 버금갈 만큼이나 아득한 옛날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비록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漢字로 표기된 지명이긴 하지만 그 기록 연대와 구체적인 지명이 남겨진 것은 기원전의 馬韓 54국명과 弁辰 24국명이다. 모두 합하여 78개 국명인데 사실상 개개의 이름에 접미하고 있는 ‘國’을 제거하면 순수한 고유어 地名만 남게 된다. 이것들은 우리의 고대 地名을 당시의 중국인들이 들은 그대로 漢字音을 가지고 轉寫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 발전과 함께 우리 민족의 필요에 따라 지명은 끊임없이 조어되어 왔기에 그 수는 한없이 누증되어 온 것이라 하겠다.


3. 地名 硏究의 必要

  인류의 문화가 지상을 벗어나 허공에 창조될 수는 없었다. 長久한 세월에 亙하여 不斷히 전개되어 온 인간 문물의 터전이 곧 地上의 어느 한 지역이요, 그 지역 혹은 지점의 호칭이 곧 지명이다. 따라서 인간과 지명은 인간과 인명의 관계처럼 상호 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지명은 인류가 남긴 허다한 史的인 秘話를 고이 간직하여 왔다. 우리가 지난날의 古地名에 대하여 至大한 관심을 갖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久遠한 인류의 역사에 비하여 그리 길지 못한 문자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 문자의 초기 상태는 지극히 미흡한 것이었다. 이런 약점 때문에 문자 시대의 이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이후의 어느 시기까지도 인류의 귀중한 遺産들이 기록되기에 앞서 인멸되어 버리는 액운을 免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地下에 숨겨진 이른바 고고학적인 遺物에 의거하여 다행히도 고대 인류 문화의 윤곽을 고증하는 데 一助가 되는 기회에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여기에만 한정되거나, 의존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지명이 無形의 존재이긴 하나 우리의 조상이 남긴 地下 혹은 地上의 遺物 못지 않게 그것은 인류사의 秘話를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 묻힌 문화 유산들이 거의 변화를 모르고 잔존해 있듯이, 지명 역시 일반 어휘에 비하여 좀체로 변화를 싫어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명을 無形의 고고학적 자료라고 풀이하고 싶다. 가령 영토가 변하고 종족의 이동이나 침략으로 인하여 그 語族이 바뀜으로 말미암아 어떤 언어가 전혀 다른 언어로 置換된다 할지라도 그곳의 기존 地名만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그 강한 보수성을 우리는 세계 각국의 지명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地名史에서도 동일한 사실이 발견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재되어 있는 고지명들이 신라 경덕왕(757)의 改名으로 졸지에 인위적인 변혁을 입긴 하였지만 이 작업은 대체적으로 보아 그 語形을 2음절형으로 고정시켰던 것 뿐이며, 대개가 前次形을 근간으로 改名되었던 것이지 결코 전혀 근거 없는 新作名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로 인하여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 死語가 된 것은 아니었고 다만 新生 二字式 표기의 한자 지명이 점진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됨에 따라 양자가 병존하게 되어 (물론 경덕왕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한자어 지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천 수백년을 경과한 오늘날까지 상당수가 원형을 그대로 아니면 약간 변형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確然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조상들이 남긴 값진 문화유산의 秘話를 秘藏하고 있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지명 어휘들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연구에 필요하게 되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국어의 계통, 고대 국어의 재구, 국어의 어원, 국어 변천사 등의 연구에 지극히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둘째 ;한국의 역사, 역사 지리, 민속, 민담, 신화, 전설, 제도 등 문화사 전반의 연구의 자료가 되어 준다.
  셋째 ;우리 민족의 성립 및 이동은 물론 타민족과의 문화사적 교류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긴요한 자료가 되어 준다.
  넷째 ;역사학, 고고학, 지리학, 민속학, 사회학, 경제학, 설화 문학 등에 대한 보조 과학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지명을 접두한 物名(産地名), 地名과 人名, 地名과 新造語 등과 깊은 관계가 밝혀질 수 있다.
  실로 한 나라의 언어에는 한량없는 어휘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그 수가 가장 많고 또한 사용 빈도가 높은 어휘가 곧 지명이다. 따라서 지명은 우리 민족의 고유어의 뼈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言語材이기도 하다. 또한 방언의 연구나 국어 조어법의 연구에 있어서도 지명은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명 연구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되어 마땅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지리지(1, 2, 3, 4)를 비롯하여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地理志를 一見하여 보더라도 이 책들이 한결같이 서두에 지명을 내세워 기술하고 있다. 우선 행정 구역부터 제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행정 구역을 지시하는 地名을 무대로 펼쳐지는 정치, 문화, 경제, 교육, 상업, 산업 등의 인간 활동의 내용이 기술되거나 등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地名의 수집과 분석 기술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國語史의 연구에 있어서는 더욱 긴요한 존재가 곧 地名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古代 國語의 자료를 거의 확보하지 못하였다. 옛 문헌 자료에서 뽑을 수 있는 것들이라야 人名, 官職名이 고작인데 역시 貧困하기 짝이 없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古地名은 量的인 면에서 우선 압도적이다. 앞에서 잠시 言及한 三韓의 78個 古地名을 비롯하여 삼국사기의 地名(地理 1, 2, 3, 4)과 同書의 本紀와 삼국유사에 남겨진 地名들은 우리의 古代 國語를 재구하는 데 있어서 의지하여야 할 절대적인 언어재들이다. 요컨대 현재의 우리로서는 향가 25수를 빼놓고는 우리의 고대 국어 연구를 전적으로 地名에 의존하여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韓國史의 記述에서 야기되는 여러 문제도 古地名에 依해서 해결하여야 할 경우가 非一非再하다. 이 밖에도 한국학에 있어서 地名이 가지는 가치는 지극히 높다. 따라서 지명 연구의 필요성은 재삼 강조받아 마땅하다.


4. 地名의 特性

    4.1 地名의 發生

  地名은 일종의 고유 명사이다. 고유 명사의 발생 요인은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기 위한 데 있다. 따라서 地名은 인간이 한 지점 혹은 지역을 다른 지점 혹은 지역과 구별하기 위한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마치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마다 이름을 짓듯이 땅도 곳곳을 구별하기 위하여 곳곳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가령 사람들이 어느 특정한 ‘江’을 하나만 발견하고 그 강변에서 살 때는 ‘江’이란 보통 명사만으로 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江’을 몇 개 더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江’끼리의 구별을 위하여 ‘X江, Y江, Z江…’ 式으로 ‘江’마다 고유명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江’의 이름도 같은 방식으로 발생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아주 먼 옛날로부터 사람은 山속 아니면 江邊(혹은 川邊)에서 거주하여 왔다. 그 거주지의 주변에 늘어선 멀고 가까운 ‘山’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이 山 저 山에 고유명을 명명하게 되었다. 거주지에 대한 지명도 같은 이유에서 발생하였다. 내가 사는 고장을 다른 사람이 사는 고장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유명(地名)을 부여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물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라면 보통 명사만으로 족하다. 가령 ‘하늘, 해, 달’은 모두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해, 달’은 보통 명사이자 그것이 곧 고유 명사가 된다. 그러나 ‘달’은 유일하면서도 그 모양이 한 달 내내 바뀌기 때문에 모양이 다른‘달’을 구별하기 위하여 ‘초승달, 보름달, 반달, 그믐달’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별’도 밤하늘에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별’마다 고유 칭호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은 보통 명사로부터 고유 명사의 분화 원리가 곧 地名의 발생 원리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전제한 바와 같이 地名도 고유 명사의 범주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地形이나 地勢에 대한 보통 명사부터 발생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말하자면 ‘山, 江, 들, 골, 벌’이나 ‘잣(城), 마을(村, 里, 洞)’이 먼저 발생하고 이에서 서로를 구별하기 위하여 이것들 앞에 독특한 접두어를 붙여 파생 지명을 생성한 것이라 하겠다.


    4.2 地名의 保守性

  지명은 일반 어휘에 비하여 대체로 변화를 싫어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명을 無形의 고고학적 자료라고 명명하고 싶다. 가령 영토가 변하고 민족의 이동이나 침략으로 인하여 토착인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결국에는 그 언어가 다른(침략자의) 언어로 置煥된다 할지라도 그곳의 토착 지명만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계 각국의 토착 지명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가 있다.
  가령 Hawaii, Honolulu, Waikiki등은 원주민의 토착 지명이며, Tennessee, Iowa, Oklahoma, Kansas, Michigan, Kentucky, Illinois, Texas, Chicago 등은 인디언의 토착 지명이다. 또한 이태리의 Napoli는 이곳으로부터의 서쪽으로 20㎞ 떨어진 Cuma에 기원전 800년경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희랍인들이 200년 후에 일차로 건설한 희랍의 식민 도시이었다. 얼마 후에 Cuma로부터 희랍의 식민 집단이 재차 이주하여 처음 정착한 도시 곁에 新居住 集團을 형성하자 보다 먼저 형성된 도시의 이름은 Palaepolis(the old city)라 불리어지게 되었고 새로 형성된 도시의 이름을 Neapolis(the new city)라 명명하였다. 기원전 320년에 Roma가 이곳을 정복한 이후에도 토착 지명(희랍어)인 Neaplis는 그대로 사용되었고, 이후로도 그 명맥이 이어져 Palae+Polis:Nea+Polis>Napolis>Napoli~Napoles로 변하였지만 결코 Roma 어로 바뀌지 않았고, 그 어형의 근간은 거의 2,600년간이나 지속된 것이다.
  우리의 地名史에서도 동일한 사실이 발견된다. 함경도 지방에서 조선 초기까지 쓰였던 女眞의 지명이 용비어천가의 지명 주석에서 발견된다. 童巾(퉁권)山, 豆漫(투먼)江, 雙介(쌍개)院, 羅端(라단)山, 回叱家(횟갸), 斡東(오동), 禿魯(투루)江 등의 여진 지명이 바로 그것들이다.
  앞에서 실례를 제시한 바와 같이 지명은 보수성이 아주 강인하다. 原初 地名이 대개의 경우 어느 곳엔가 잔존하여 있거나 化石語로라도 남아 있기 마련이다. 고대에는 郡의 이름이었는데 후대에 와서는 보다 작은 鄕名으로 格下되어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음이 그 좋은 예이다. 가령 夫餘의 처음 이름인 ‘소부리’(新夫里)가 부여읍에 사는 村老들에 의하여 아직까지도 쓰이고 있으며, 公州의 옛 이름인 ‘고마’(熊津)가 지금도 나루 이름인 ‘곰나루, 고마나루’로 현지에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이 原初 地名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이에 대한 인위적인 개정 지명이 공존하게 되고, 여기에 다시 새로 생겨나서 추가되기도 한다.


    4.3 地名의 變化

  지명의 보수성은 일반 어휘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앞에서 우리는 확인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절대불변의 존재란 의미는 결코 아니다. 지명도 오랜 세월을 통하여 여러 모로 변화한다. 지명 역시 어휘 체계 내의 한 존재인 고로 통시적으로는 음운사에 순응하여 일반 어휘와 함께 음운 변화를 입는다. 마찬가지로 공시적인 음운 변화에도 순응한다. 예를 들면, ‘徐伐>셔블>셔>셔울>서울’은 유성음 사이에서의 ‘ㅂ’의 약화 탈락이란 국어음사사의 한 규칙에 순응한 결과이자 설단 자음 뒤에서의 반모음 y 탈락이란 규칙에 순응한 결과이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지명 중에서 ‘배오개’(<배고개), ‘가래올’(<가래골) 등은 하강 이중 모음 뒤에서 ‘ㄱ’의 탈락 규칙에 순응한 결과이다. 예를 하나 더 들면 ‘徐那:徐羅:徐耶’와 ‘加那:加羅:加耶’는 ‘n>r>y’의 음운 변화 규칙이 고대 국어에서부터 야기되었음을 암시하는 지명의 음운 변화 현상이라 하겠다.
  지명은 공시적 음운 변화 규칙에도 순응한다.
  도자(1932)는 지명도 일반 어휘처럼 방언의 음운 규칙에 따라서 변화를 일으킨다고 지적하고 그 실례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라틴 어 지명인 Fabrica는 규칙적으로 Provence에서는 Fabrego가 되고, Savoie에서는 Faverge가 되고, 남부 및 서남부에서는 Fargue가 되고, Aurergne와 Limousin 지역에서는 Farge로 변하였고, 북부 지역에서는 Forge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 내의 지명의 어형은 특수한 단어의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 지역의 구조와 화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지명도 방언 음운의 지배에 의하여 규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경상도→증상도, 계룡산→제롱산, 긴밭들(長田里)→짐밭들, 길티(長峙)고개→절티고개, 김천(金泉)→짐천, 김제(金堤)→짐제, 향교골(鄕校村)→생교골’ 등과 같이 구개음화 규칙을 소유하고 있는 방언 구역에서는 이 규칙을 지명에도 철저하게 적용을 한다. ‘곰개(熊浦)→공개, 곰골(熊谷)→공골, 샴골(泉洞)→샹골, 긴밭들(長田里)→짐밭들’ 등처럼 자음 동화 규칙에 순응하기도 하고, ‘강경(江景)→갱경, 놀뫼(論山)→뇔미, 덕바위(德岩)→덕바우, 울바위(鳴岩)→울바우’등과 같이 모음 변화 규칙에 순응하기도 한다.
  지명은 음운 변화에 의해서만 변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행정 구역의 정비나 昇格 혹은 格下에 따라서 기존 지명을 구성하고 있는 형태소의 일부가 다른 형태소로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제 시대의 ‘井村’이 신라 경덕왕(757)에 의하여 ‘井邑’이 되고, 최근에 ‘井邑’이 市로 昇格됨에 따라서 ‘井州市’가 되었다. 백제 시대의 ‘餘村’은 경덕왕이 ‘餘邑’으로 개정하였고, 고려 태조가 ‘餘美’로 바꾼 뒤에 다시 餘라美의 일부와 高邱의 일부를 합하여 貞海縣을 신설하였다. 조선 초의 太宗이 ‘餘美’와 ‘貞海’를 통합하고, 뒷부분만 택하여 ‘海美’라 개칭하였다. 현대 지명에서 한 예를 들면, 官洞이란 地名은 이 마을이 上·下로 분리됨에 따라서 上官·下官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內洞, 邊洞, 外離, 內離 등이 같은 범주에 들 수 있는 예들이다. 이처럼 地名은 그것이 지시하는 지역 범위의 축소나 확대, 혹은 이웃 지역과의 統廢合에 따라서 地名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바뀌기도 한다.
  地名은 별명을 갖는 변화를 입기도 한다. 가령 현 扶餘는 신라 경덕왕이 개정하기 이전에는 ‘所夫里’이었다. 그런데 내내 ‘所夫里’로 불리어 오던 지명을 버리고 百濟의 聖王이 公州에서 이곳으로 서울을 옮기면서 새로운 國名으로 명명하였던 南扶餘에서 ‘扶餘’만 떼어서 경덕왕(757)이 새로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두 지명 ‘所夫里’와 ‘夫餘’가 공존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마치 인명에서 兒名를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 주어도 그 사람에게는 내내 두 이름이 아울러 불리어지듯이, 지명도 新舊 地名이 그대로 공존한다.


5. 地名의 語源과 傳說

    5.1 中原과 塔坪의 유래

  현 中原군의 옛 이름은 中原京이다. 그리고 塔坪리는 中原군 可金면에 있는 동리인데 그곳에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塔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塔은 신라 원성왕(785~798) 때에 세워졌다. 세운 목적은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한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塔의 높이가 14m나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 塔의 이름을 中央塔이라 명명하였다. 신라는 국토 통일을 성취한 이후 영토의 중앙부를 확정하기 위하여 길을 잘 걷는 사람 둘을 선택하여 남북의 양 끝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국토의 중앙을 향하여 동일한 보조로 걷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이 만난 곳이 곧 中央塔이 서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탑들’(塔坪)은 塔이 세워진 이후에 발생한 지명이다.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전국을 9개로 나누고 몇 곳에 小京을 두었다. 北原小京과 南原小京의 中間에 위치한 지역을 中原小京 혹은 中原京이라 하였다. 현 忠州란 이름이 곧 이 中原에서부터 유래하였다. 忠州의 ‘忠’자는 ‘中’과 ‘心’의 두 글자로 구성된 字이기 때문에 역시 中心部 곧 中原이란 의미를 달리 표현한 지명이라 하겠다. 또한 이곳에는 ‘半川’이라는 시내가 흐른다. 이 내를 ‘안반내’라고도 부르는데 半川은 남과 북의 절반이란 의미를 띠고 있으며 ‘안반내’는 지금의 韓半來의 옛 이름인데 여기 韓의 뜻은 ‘한내, 한복판, 한가운데, 한가위’ 등에 접두한 ‘한’에 해당한다. 따라서 ‘안반내’의 原形은 ‘한반내’일 것이며, 이것을 한자로 音寫하다 보니 ‘韓半來’가 되었을 것이다.


    5.2 報恩 雉岳의 유래

  조선 시대의 世祖가 피부병을 부처님의 힘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明山大刹인 속리산 법주사에 행차하였다고 한다. 세조가 이곳에 와서 머무르는 동안의 어느 날 시내에서 목욕을 하는데 보살의 화신인 아름다운 한 소녀가 나타나 “상감마마께서는 곧 병이 나을 것이옵니다. ”라고 아뢰고 사라졌다. 그 뒤에 세조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 그리하여 세조는 스스로의 피부병을 고친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그곳을 報恩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강원도 原城郡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雉岳山도 비슷한 유래를 지니고 있다.
  옛날 雉岳山의 上院寺 주지가 鐘을 만들기 위하여 십만 가구에서 숟가락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거두어 들인 숟가락 중 절반을 여자 보살과 내통하여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의 노여움을 사 종이 완성된 후에 종을 쳐도 전혀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종이 울릴 때까지 두 남녀가 구렁이로 변하여 살도록 저주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뒤에 경상도 義城에 사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려고 漢陽에 가던 중 이 산기슭에서 꿩을 칭칭 감은 구렁이를 발견하고 그 구렁이를 활로 쏘아 꿩을 살려 주었다. 이날 밤에 그 선비는 깊은 산장에서 여자 홀로 사는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낮에 선비의 화살을 맞고 죽은 구렁이의 아내인지라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잠든 선비를 칭칭 감고 하는 말이 “만일 상원사의 종소리가 세 번 나도록 울려 주지 않으면 너를 잡아먹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먼동이 틀 무렵에 갑자기 빈 절간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고, 구렁이는 약속대로 사라져 버렸다. 선비는 기이한 생각에 절에 가 본즉 종 밑에 세 마리의 어린 꿩이 머리가 깨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두 구렁이는 저주받은 주지와 보살이었다고 하며 그 구렁이를 죽여 생명을 구하여 준 선비에게 꿩이 은혜를 갚았다하여 이 산을 雉岳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5.3 蟾津江의 유래

  蟾津江은 전라남도 光陽郡과 경상남도 河東郡 사이의 道界를 이루는 江이다. 이 江의 보다 이른 이름은 豆恥江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 蟾津江으로 배를 타고 들어오자 이곳의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적의 병선이 이 강에 도착하자 갑자기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새까맣게 떼로 몰려와 울부짖는 바람에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끼쳐 왜병들이 감히 상륙할 생각조차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왜병들이 후퇴하자 두꺼비들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豆恥江이라 부르던 이 江을 蟾津江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지금까지도 섬진강 부근의 나루터에는 큰 두꺼비들이 가끔 나타난다고 한다.
  이상은 지명 유래를 통하여 지명의 어원을 밝힐 수 있는 좋은 예들이다.


    5.4 地名과 傳說의 상관성

  地名과 傳說의 상관성에 있어서 그 발생의 先後 문제는 지극히 풀기 어려운 難題이다. 우리가 地名과 관련된 傳說을 놓고 그 生成 과정에 있어서 地名이 먼저이냐 아니면 傳說이 먼저이냐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할 때 皮相的으로는 어떤 결론도 함부로 내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대부분의 견해들은 傳說이 先發生이고 그 傳說로 因하여 地名이 뒤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 왔고 또한 일반적으로 그렇게 수긍하여 왔다. 이렇게 만든 배후에는 두 가지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전해 오는 이야기(傳說)에 역점을 두어 그 내용을 강조하려니까 자연적으로 傳說부터 앞세워 역설하고 그러고 나서 그 전설로 인하여 地名이 생겼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이었겠지만 옛 문헌에 등기되어 전하는 傳說의 대부분이 傳說이 먼저 발생하고 그 傳說로 인하여 地名이 뒤에 발생한 것으로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와 반대의 입장에서 출발하게 된다. 地名이 먼저 발생하고 그 地名으로 인하여 傳說이 발생한 것임을 다음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두 용어를 정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傳說이 먼저 생성되고 傳說로 인하여 유래하는 地名을 傳說 地名이라 부르고, 반대로 地名이 먼저 발생한 뒤에 그 地名으로 인하여 유래한 傳說을 地名 傳說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러나 앞에서 규정한 地名 傳說과 傳說地名이때로는 混錯 상태에 빠져 어느 것인가를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는 傳說 자체를 면밀히 분석 검토하는 길과 해당 地名을 언어학 및 지명학적 분석 기술하는 길를 택할 수 있다. 이제까지 제기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관심을 가져 왔다면 대체적으로 前者에 해당하는 외길만 걸어온 느낌이 들며 아니면 보다 과학적인 판단을 위하여 채택되어야 할 두 길이 모두 방치되어 온 경향마저 있었지 않았나 한다.
  실로 그동안 傳說에 접근하는 학계의 관심이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에 관하여 비교적 소극적이었거나 아니면 거의 무관심한 상태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그것이 地名 傳說이든 傳說 地名이든 일단 傳說을 논의함에 있어서는 그 발생 원인, 생성 과정 등이 보다 과학적으로 분석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것이 地名 傳說인데도 불구하고 傳說 地名으로 誤認되어 온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이 傳說 地名으로 착각된 地名 傳說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白馬江 傳說’과 ‘곰나루 傳說’을 모델로 택하여 논의하여 보고자 한다. 白馬江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1454)에서부터 비롯된다. 보다 이른 시기에 있어서의 호칭은 ‘白江’이었다. 삼국사기(1145)는 말할 것도 없고 日本書紀(720)조차도 ‘白江’만이 나타날 뿐이며 白馬江은 고사하고 白村江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白村’만이 日本書紀에 단 한 번 나타난다. 따라서 그 原初形은 白江이었던 것인데 거기에 ‘村’자가 후대에 삽입되어 白村江이 되었고 이 白村江이 다시 白馬江으로 변천한 것이라 본다.
  여기서 우리가 白馬江의 前身으로 추정되는 白村江을 분석할 때 3개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지명어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하여 ‘白+村+江’〉‘白+馬+江’과 같은 형태소의 분석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각 형태소를 표기한 漢字를 새김으로 풀면 ‘白=+村=+江=’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村’과 ‘馬’는 그 새김 소리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村’에 대한 音借表記로 ‘馬’의 새김 소리를 빌어 적을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村〉馬’의 표기 변화가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려 한다. 이처럼 ‘村’의 고유어인 ‘+’을 ‘馬’의 새김 소리로 추상적인 표기를 한 것이 곧 白馬江의 ‘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어인 江名이 ‘白村江〉白馬江’으로 변하였고, 표기는 이렇게 한자로 하였으나 실제로 부른 江名은 ‘*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리던 江名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白馬’(흰말)라는 일반 어휘에 유추되어 앞에서 제시한 본래의 어휘 의미를 상실하고 ‘白村’의 의미인 ‘白馬’()가 ‘흰말’이란 의미의 白馬로 전의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白村의 의미인‘白馬’에서 흰말의 의미인 ‘白馬’로 굳어진 뒤에야 비로소 白馬江 傳說이 생성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白馬江 傳說은 ‘白馬’라는 어휘가 고유어에서 한자어로 전의되는 과정이나 전의가 완료된 이후에 地名으로 인하여 생긴 地名 傳說이라 하겠다.
  다른 하나의 모델로 우리는 ‘곰나루 傳說’을 택할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白馬江 傳說’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전설의 내용은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마’는 둘째 음절의 모음이 탈락하여 ‘곰’이 되었다. 이제까지의 통설로는 ‘곰’(〈고마)의 뜻을 ‘神·大·多·熊’으로만 풀이하여 왔다. 그런데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熊川·熊浦·熊津’을 조사한 결과 그것들이 대개 중심되는 ‘마을·邑·縣·州’를 기점으로 해서 北쪽 아니면 西北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熊川, 熊浦는 ‘後川, 後浦, 北川, 北浦’의 뜻으로 풀 수 있는 근거를 그 위치의 方位로 보아서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 똑같은 熊川, 熊浦인데 어째서 유독 公州에 있는 熊津에만 ‘곰나루 전설’이 형성되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실로 公州의 西北에 위치한 하나의 津渡인 ‘곰나루’의 ‘곰’의 咸悅(全北 益山郡)의 西北에 위치한 선착장인 ‘곰개’(津浦)의 ‘곰’과 동일 의미인 ‘後·北’(北津, 後津, 後浦, 北浦)이었다. 이렇게 뒤(後北)의 뜻으로 사용된 ‘곰’이 마침내 동물명 ‘곰’(熊)과 동음이의어이었기 때문에 ‘熊’의 釋音借로 ‘後·北’을 표기하였던 것인데 어느 시기엔가 동음이의인 동물의 ‘곰’(熊)과 혼동되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熊의 새김은 동물‘곰’으로 변함없이 전승되었지만 ‘後·北’을 표기하기 위하여 차용한 釋音借는 熊의 본뜻(동물 곰)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속에서 점점 본뜻(동물 곰)에 밀려 본래의 의미(後·北)는 소실되고 말았다.
  요컨대 본래에는 北津의 의미인 ‘고마’가 熊津으로 표기된 이후 점차 차용 한자 熊의 의미인 동물명으로 전의되는 과정이나 漢語化한 뒤에 새로운 어휘 의미인 동물 곰으로 인하여 발생한 地名 傳說로 추정하는 것이다.


6. 地名의 意義

  모든 지명은 두 의미를 갖는다. 그 하나는 ‘좁은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의미’이다.
  6.1 좁은 의미 : 개개의 지명이 발생할 때 부여된 의미이다. 그 지명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의 ‘왜’에 대한 대답이 곧 그 지명의 의미일 수 있다. 가령 ‘大田’이란 지명의 原初名의 ‘한밭’이다. ‘큰 밭’이 있기 때문에 실존한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지명이다. 따라서 이 지명은 ‘큰 밭’이란 뜻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의 ‘連山’은 고려 때에 ‘黃山’에서 바뀐 이름이고, 이 ‘黃山’은 백제 때의 ‘黃等也山’에서 개명된 것이다. 이 지명은 ‘山이 늘어서 있는 곳’이란 의미를 부여받고 출발하였다. 이처럼 모든 지명은 저마다 태어날 때 일정한 의미를 부여받거나, 그 의미를 나타내는 어형(音韻形)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곧 지명의 좁은 의미이다. 한국의 지명에서 의미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명으로 ‘거츨뫼(荒山), 구무바회(孔岩), 대밭(竹田), 돋여흘(猪灘), 돌개(石浦), 뒷(北泉洞), 몰애오개(沙峴), 얌개(蛇浦), 블근못(赤池), 살여흘(箭灘), 션돌(立石) 솓뫼(鼎山), 쇠잣(金城), 숫고개(炭峴)’ 등을 열거할 수 있고, 女眞의 지명으로 ‘童巾(퉁권=鍾), 豆漫(투먼=萬), 雙介(쌍개=孔, 穴), 斡合(워허=石), 羅端(라단=七)’ 등을 들 수 있고, 아메리칸 인디언의 지명으로 ‘Dakota(동맹한, 연합한), Tennessee(큰 굴곡의 덩굴), Iowa(졸린 사람들), Oklahoma(赤人), Kansas(그라운드 부근의 산들바람), Michigan(큰물), Kentucky(암흑과 유혈의 그라운드), Illinois(완벽한 인간 종족), Texas(친구), Idaho(아침 인사), Mississippi(물의 아버지)’ 등을 열거할 수 있다.
  하와이 군도에서도‘Molo-(島), Wai-(水)’와 같은 지명 형태소의 의미가 발견된다.

  6.2 넓은 의미 : 대개의 경우 原初 지명이 지시하는 장소는 그리 넓지 않다. 가령 앞에서 예로 든 ‘大田’(한밭)의 원위치는 현 大田驛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명의 발생 당시는 ‘큰 밭’이 있는 하나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명에 따라서는 그 지시 범위가 市勢의 확장에 따라서 점점 廣域化한다. 그 넓어짐의 정도에 따라 이웃하여 있는 大小의 마을이 흡수되고 드디어 처음에 부여된 ‘한밭’이라는 의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큰 밭이 없는 곳까지 여러 마을을 포괄 지칭하게 되어‘大田’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이제는 ‘大田’하면 그 개념이 현재의 市政이 미치는 區域 內라는 의미로 확대되는 것이다.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지명이 풀이될 수도 있다. 가령 ‘釜山’이란 지명은 다음과 같은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 한국에서 둘째가는 도시이다.
② 인구가 500만 명이나 된다.
③ 가옥의 수, 문화 시설의 정도, 교육 기관….
④ 한반도 최남단의 바닷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⑤ 특산물이 무엇무엇이다.
   :
   :
  등과 같이 ‘부산 인구, 부산 대학, 부산 시장, 부산 특산물, 부산 기업…’과 같이 그 區域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부산을 관형어로 접두할 수 있는 모든 실존 사물을 소유하는 의미를 가진다. 브리태니카 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은 大地名인 London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27쪽이나 할애를 하였다. 그런데도 ‘런던’의 내용을 빠짐없이 기술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大地名이 지닌 넓은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邑誌, 郡誌, 道誌, 市誌 등이 지닌 넓은 의미는 곧 각각의 誌에 담긴 내용 이상의 넓은 범위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지명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저 섬 이름인‘세인트 헬레나’를 史家는 나폴레옹의 전쟁을 체계화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이며, 詩人은 이 섬 이름에서 영웅의 말로를 연상하여 인생의 갖가지 비극을 찾을 것이다.
  또한 ‘시르지’라는 지명을 놓고 생각할 때 당진군 송산면에 사는 사람들은 해변의 대지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로 ‘시르지’를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접촉이 없는, 그리고 이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도 구석이나, 경상도의 산골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국적인 어떤 어휘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런고로 지명은 정착성이 있음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비근한 예를 하나만 더 들자. 가령 메이지마치(明治町)란 지명은 젊은이로 하여금 이 지명에서 失戀의 슬픔을 회상케 할 수도 있겠고, 상인에게는 돈벌이가 잘 되는 곳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등의 갖가지 複意가 함축되어 있다 할 것이다.
  실로 동일 地名이라 할지라도 문필가가 표현하는 지명의 의미, 민속학자가 해석하는 지명의 의미, 지리학자가 부여하는 지명의 의미, 역사가가 찾아내는 지명의 의미 등은 그 기술의 결과가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의미를 종합한 내용이 곧 지명의 넓은 의미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7. 地名과 地圖의 관계

  지명과 지도의 관계는 손바닥과 손등만큼 가까운 사이다. 바닥과 등 어느 하나만 없어도 손이 성립될 수 없듯이, 지명과 지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지명이 없이는 지도가 성립할 수 없다. 지명 또한 지도가 없다면 그 위치가 어느 곳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가 없다. 언중이나 주민들이 막연하게 불러 주고 또한 막연하게 그 위치가 어느 곳이라고 인식할 뿐 그것을 일정한 위치에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도일 뿐이다. 가령 甲이란 지명의 위치가 어느 곳이며, 그 한계가 어디서 어디까지라는 기록이 있다 하자. 이런 기록에 의거 지도 위에 그 위치와 한계를 잡아서 표시하면 우리는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직감하게 된다. 따라서 지도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배치하여 그 지명의 위치와 범위를 정해 주는 시각적 認識圖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地圖는 지명과 지명 사이의 거리를 視覺化한 것이다. 따라서 개개 地名의 限界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大地名 안에 배치된 보다 작은 지명들의 위치와 한계를 알게 한다.
  地理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地名이 차지하는 지위는 높다. 고대의 경우를 회고할 때 경덕왕(757)이 새로운 지리적 인식을 가지고 전국을 9州로 나누고 그 구체적인 표현을 地名으로 하였다. 地名 意識의 앙양은 역시 地名의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요컨대, 지도는 지역을 投影하는 것이므로 地域을 표현하는 지명은 당연히 중요한 지도 요소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도는 지명의 기록을 收容하는 容器이다.
  한국의 지명이 지도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東國輿地勝覽(1481)부터이다. 그 이전의 三國史記, 高麗史, 世宗實錄 등의 지리지는 地名에 대한 기록만 남겼을 뿐 지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맨 앞에서 제시한 <지도 1>과 비교한다면 한국의 지명을 도표에 기록한 최초의 한국 지도는 너무나도 뒤늦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비록 늦게나마 지도가 작성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최초의 지도라서 그렇겠지만 동국여지승람의 지도는 지극히 소략한 것이었다. 이 책은 앞에다 지도를 제시하고 있다. 그 지도에 기록된 지명은 縣 단위 이상의 행정 구역명과 이름난 山名과 江名을 질서 있게 위치별로 명시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첫머리에 ‘八道總圖’가 제시되었고, 各 道의 郡縣을 기술하기 전에 먼저 道別로 지도를 제시하고 그 지도에 기록된 郡·縣과 그 郡縣에 있는 名山과 大江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이 가지는 최초의 지도는 ‘八道總圖’를 비롯하여 各 道에 해당하는 지도 1매씩 모두 9매가 된다. 이 지도는 우선 江을 그리고 이름난 山을 그린 다음 그 이름을 밝히어 적었다. 그리고는 縣·郡·府의 位置를 찾아서 配置하였다. 지극히 소박한 지도이지만 이만큼이라도 초기에 이루어졌음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로부터 약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작성된 輿地圖書(1757~1765)에 이르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지도는 보다 구체적이고도 호화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各 道의 구성은 첫머리에 各 道의 全圖(雙葉彩色地圖一張)를 싣고 있으며, 各個 郡·邑誌에 있어서도 첫머리에 한 장의 雙葉彩色地圖를 실은 다음에 그 邑誌의 내용을 싣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개의 지도에는 그 골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명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輿地圖書’는 그 책 이름 그대로 당시의 全國의 都·府·州·郡·邑·縣과 同數의 지도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꽤 작은 지명까지 지도에 기록화된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으로 추측되는 金正浩의 ‘靑丘圖’(1837?)와 이에서 보다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진 그의 ‘大東輿地圖’에 이르면 현대식 지도에 버금갈 만큼 그 내용이 자세하여진다. 이 지도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俗地名을 많이 담고 있다. 각종의 地理誌가 기록화하지 못한 小地名까지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지명 연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鄭寅普(1946)와 李丙燾(1959)에서 馬韓 54국명의 위치를 比定하고 각 국명을 배치하여 馬韓圖를 작성하였다. 都守熙(1979~1986)에서도 삼국사기 권 34~37(지리 1~4)의 古地名의 위치를 모두 찾아서 배치하고 그 판도를 그리었다. 이렇게 작성된 지도 위의 지명은 우선 추상적인 역사적 기술에 의하여 추정한 국경의 한계가 잘못 그어졌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잘 풀리지 않는 지명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얻게 될 경우도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지명 어휘의 분포와 그 특징을 밝히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都守熙(1986)에서 제시한 삼국사기 권36을 중심으로 한 지명 분포도를 하나의 실례로 위에 예시하였다.(<지도 2> 참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유의할 일이 있다. 최초의 현대식 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5만분지 1 혹은 2만 5천분지 1의 초간 지도가 필요하다. 최근에 와서 地形의 人爲的 變形으로 이왕에 기록된 옛 지명들이 상당히 소멸되어 가고 있다. 또한 지명의 급격한 변화로 본래의 지명이나, 묵은 지명이 새로 생긴 지명으로 바뀌어 기록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될수록 일찍이 찍혀 나온 현대 지도 즉 金正活의 ‘大東輿地圖’에 이어지는 최초의 현대식 지도를 입수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거기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누대로 사용하여 온 전래의 고유 지명이 어느 정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현대의 한국 지도에 기록된 지명의 양과 종류는 이왕에 출간된 어떤 지명 사전의 그것보다 월등히 풍부하다. 앞으로 5만분의 1(혹은 2만 5천분의 1) 지도에 명시된 모든 지명을 담은 ‘대한국 지명 사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옛 지명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하여는 각종의 地理誌를 취합하여 인쇄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한국 지명을 담은 최초의 지도로부터 최초의 현대 지도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사업으로 인쇄 보존할 필요가 있고, 이 사업이 또한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8. 地名學(Toponomy)의 이해

    8.1 地名 硏究의 내용

  지명학은 지명의 의미와 기원을 고찰하고 그것의 변천상을 연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地名’도 언어 활동을 위해서 생성된 일종의 어휘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명 연구의 본산인 지명학도 언어학의 한 하위 분야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지명도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학의 품을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국 지명만을 대상으로 고찰할 때에는 일단 국어학에 해당하는 개별 언어학의 범주 안에 들게 된다. 그 연구 범위를 세계의 지명으로 확대하게 되면 일반 언어학의 영역에 포함된다.
  그러나 지명의 연구에서 언어학의 지식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언어학의 지식을 주축으로 이에 역사학, 고고학, 지리학, 인류학, 민속학 등의 보조 과학이 동원되어야 비로소 그 완벽을 기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그 연구 범위를 좁혀서 우리 국어학의 입장에 서게 될 때도 그 방법에 따라서 연구 결과가 상이하게 나타날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우선 공시론적인 입장에서 지명어를 분석하려 할 때 음운론, 형태론, 어휘론, 의미론의 접근이 가능하며, 통시론적 견지에서 고찰할 때 음운사, 어휘사, 어원론 등의 이론을 배경으로 국어사의 제 문제와 직결될 것으로 믿는다.


    8.2 地名 硏究의 방법

        8.2.1 언어학적인 접근

  지명 연구에 있어서의 최적격자는 언어학자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한 바와 같이 지명도 엄연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지명을 연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의 소유자는 역시 국어학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어학자라고 누구나 적격자일 수는 없다. 엄격히 말한다면 국어학자 중에서도 특히 국어사학자로 그 범위가 좁혀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에 사용하고 있는 지명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현대 국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지명 연구에 있어서 최적격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명은 비록 그것이 현대에 사용된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짧건 길건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명 연구에는 국어사학자의 참여가 지극히 바람직한 것이라 하겠다.
  실로 지명의 기원, 지명의 변천, 지명의 발생 등을 분석 기술하려면 언어학적인 접근 방법이 절실히 요청된다. 지명의 발생은 곧 그 지명을 포괄하는 언어의 어휘 발생에 해당하는 것이요, 지명의 변천 역시 일종의 어휘 변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명은 한국어의 음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국어 음운론의 지식이 거기에 투입되어야 한다. 또한 국어 음운의 규칙에 순응하여 음운 변화의 규칙이 지명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국어 음운사에도 조예가 깊어야 한다.
  한편 한국어의 어휘 구조를 분석하는 역량이 지명 어휘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도 투여되어야 할 것이다. 지명의 발생 과정이 구조적으로 정밀히 분석되어야 하며, 기존 지명에 대한 구조도 형태론적인 분석이 가해져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의 음운사, 어휘사 및 음운론·형태론에 밝은 학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더 요구되는 요건은 국어의 어휘 의미론의 지식에도 어두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지명 어휘도 일반 고유 명사와 다름없이 의미론적인 분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8.2.2 역사학적인 접근

  지명은 역사적인 산물이다. 지명의 어원, 지명의 발달을 고찰하려면 필수적으로 역사적 지식의 바탕이 요구된다. 지명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생겨나고 자라 왔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지명은 한국의 민족사·정치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 영향을 받아 변천하여 왔다. 한국사의 상식이 없는 국어사학자는 어떤 지명이 어느 시대에 발생하여 어느 국가(예를 들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등)에 의하여 쓰여진 것인가를 감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명의 연구자는 한국사의 지식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고고학적인 지식이 적절히 가미될 수 있다면 금상의 첨화가 될 것이다. 가령 어떤 지명과 그 지명이 지시하는 지역 혹은 지점에서 발굴되는 지하의 유물은 그 지명과 깊은 관계를 가질 것이기 때문에 이 둘 사이는 대체적으로 친밀성을 갖게 된다. 이 경우에 지명의 속성을 파악할 수 없을 때에 그 아래에서 발굴된 유물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도 있고, 이와 반대로 유물의 속성이 불분명한 경우에 지명이 그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것이다. 이처럼 양자는 상보적 관계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8.2.3 지리학적인 접근

  ‘지리학’의 의미를 갖는 geography는 geŌ+graphein와 같이 분석되는 합성어이다. 여기geŌ는 ‘땅’(the earth)을 의미하며, graphein은 ‘기록’(to write)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리학(geography)은 地表(the earth's surface)를 기술하는 학문이다. 지리학에 대한 정의를 Oxford 사전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지리학은 땅의 표면을 기술하고, 그것의 형태와 물리적 자질을 고찰한다. 그리고 그것의 자연·정치적 구분, 환경(기후), 생산물, 인구 등 여러 나라의 것들을 취급하는 학문이다. 지리학은 흔히 수학적 지리학, 물리적 지리학, 정치적 지리학으로 나눈다.
  한국의 지리학은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경상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地理志는 일종의 지명록에 불과하였다. 즉 전국을 행정 구역으로 나누고 행정 단위의 지명을 수록한 것 뿐이었다. 거기에는 각 행정 단위의 지명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이 기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은 특정 지명의 영역 내에 있는 名山·名川 등 특기할 사항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그 체제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양하여진다. 그리하여 영조 때의 輿地圖書나 그 이후의 각 도의 개별적인 邑誌는 그 邑을 지시하는 지명이 소유하는 모든 사항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아울러 邑內의 略圖(지도)가 반드시 첨부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지명을 연구하려면 일종의 지리서라 할 수 있는 地理誌·邑誌에 대한 풍부한 지식까지 겸비하여야 한다.


        8.2.4 기타의 보조 학문

  우리가 지명의 전설, 지명의 신화, 지명의 설화(지명에 얽힌 이야기) 등을 수집하고 풀이하려면 한국의 민속학·설화 문학·신화학 등의 학문 지식도 겸비하여야 한다.
  앞에서 제시한 네 가지의 요건을 최소 한도만이라도 갖춘 자라야 비로소 지명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地名이 우리의 주변에서 자주 쓰이고, 그 자료의 수집이 용이하다 하여 그 연구도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여서는 안 된다. 地名의 外形은 매우 간단하게 보이고 단순하게 인식될지 모르나 그 내용은 지극히 복잡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그저 취미 삼아서 고찰하여 보자는 태도나, 언뜻 보기에 고찰이 쉬울 듯하니까 가볍게 달려들 대상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방면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고, 인접 학문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그 지식을 풍부히 겸비하여야 되는 그야말로 입체적이고도 종합적인 연구 방법과 인접 과학의 지식을 요구하는 종합 과학이라 정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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