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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

작성자 국립국어원 등록일 2009. 12. 8. 조회수 2735

국어사전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
-정인승, 최현배, 이희승, 이윤재, 정태진, 이극로, 이들은 누구인가?-


국립국어원, 2010년부터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만들기에 나서


□ 국립국어원에서는 1999년에 50만 어휘 규모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발간하였고 2008년에는 새로운 개정판을 국어원 누리집에서 웹사전으로 무료로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국민들이 좀 더 편리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구축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 구축 사업은 지식 정보 사회를 맞이하여 국가적인 언어 지식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그동안 구축되었던 표준국어대사전 등의 사전 자료와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들,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 학습 사전 자료, 국민들의 참여 등을 통한 의견 등을 통합, 정비하여 상시 새로운 정보를 반영할 수 있는 디지털 국어사전 관리 체계를 만드는 사업이다. 이에 따라 이 사업에서는 수요자가 참여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형 언어 지식 관리 체계를 만들어 수요자 중심의 한국어 자료를 집대성한 결과를 반영하고 다문화 가정 등 한국어 학습 수요가 높은 국가의 언어를 중심으로 한국어 학습용 다국어사전을 구축하게 된다.

□ 한 사회의 지식 생산과 보급, 유통은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며 국어사전은 그 지식 정보 기반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언어문화의 총화로 불린다. 지금은 웹사전을 통하여 누구나 손쉽게 사전을 통하여 국어생활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지만 지금의 국어사전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바쳤던 선각자들이 있었다. 국립국어원은 2010년 국가적 규모의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 구축 사업을 앞두고 국어사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국어사전에 일생을 바친 역사적 인물을 모아보았다. 


말모이를 아시나요?


□ 사전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말모이를 아시나요? ”라고 질문하고 싶다. ‘말모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주시경,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1910년 무렵에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하다 편찬자들의 사망이나 망명으로 끝내지 못한 사전 명칭이다.

□ ‘말모이’가 이렇게 광문회에서 편찬되는 가운데 이미 외국인들이 7, 8종의 한국어 사전을 발간한바 있다. 프랑스 말로 된 한불자전(韓佛字典), 법한자전(法韓字典), 영어로 쓴 한영자전(韓英字典)과 영한자전(英韓字典), 라틴 말로 쓴 납한자전(拉韓字典), 일본말로 쓴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과 국역사전(國譯辭典) 등이다. 


1930년 한글날 108명의 발기로 사전 편찬이 시작


□ 이에 뜻있는 이들이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사전이 있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계명구락부에 조선어사전 편찬부를 두기도 했고, 개성의 이상춘 선생, 중국 상해의 김두봉 선생 등이 사전 어휘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30년 한글날 기념식 석상에서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져 우리 손으로 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들온말 적기법(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 사전 편찬을 위한 밑 작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죄목


□ 이렇게 국어사전 편찬이 무르익는 가운데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다.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몰두하던 석인 정태진 선생에게 갑자기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온 것이다. 그것은 1942년 당시 함흥 영생여고보 4학년이던 박영희의 일기장이 발단이었다. 그녀의 2학년 때 일기의 한 부분을 일본어 사용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해석하였고, 그 배후에 석인이 있다는 쪽으로 몰아갔다. 일본 경찰은 여러 가지 사실을 거짓으로 짜맞추어 정태진 선생을 피의자 정태진으로 각본을 완성하였다. 정태진 선생이 마침 사전 편찬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빌미로 경찰은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의 단체이며, 진행 중인 사전 편찬 작업은 독립 운동의 일환이라는 등의 자백까지 억지로 받아내었다. 이 억지 자백을 근거로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3월 6일까지 45차에 걸쳐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 검거 선풍이 불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의 각오 세 가지


□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까지 최종적으로 일본 경찰에 잡힌 사람은 모두 33명이었다. 이들이 반 년 간 고문당하면서 만들어진 조서로 28명이 기소되었다. 기소된 사람은 16명, 기소 유예된 12명은 1943년 9월 18일에 석방되었다. 그 해 12월 8일에 이윤재 선생이 병고로 세상을 떠나셨고 1943년 2월 22일에는 한징 선생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에 걸친 공판 끝에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다섯 분이 실형을 받았다. 다른 일곱 분은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실형을 받은 다섯 분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감옥에서 고생하였다. 

□ 그 해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다시 모여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1) 정치 운동에 가담하지 말 것, 2) 철자법을 보급하고 사전 편찬을 계속할 것, 3) 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고 국어 교사를 양성할 것 등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본받을 만한 점이 느껴진다. 그럼 간략히 이때 실형을 받으신 다섯 분과 감옥에서 돌아가신 이윤재 선생의 이력과 오늘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건재 정인승 선생 기념관 세우다


□ 건재 정인승 선생의 사전 편찬과의 인연은 1936년 이른 봄 최현배 선생이 정인승 선생을 찾아와 조선어학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조선말큰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 사전과의 첫 만남이었다. 건재 선생이 추천된 까닭은 당시 발간되던 ‘한글’ 잡지의 물음과 대답란에 까다로운 질문으로 담당자를 곤욕스럽게 하여 학회 안에 건재 선생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때문이라 한다. 선생은 이때부터 사전 편찬은 물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수정 및 기초위원,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을 맡았고, ‘한글’의 물음과 대답란의 ‘대답’을 집필하셨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글 및 국어 강습, 강의에 정성을 쏟으며 한편으로 교재 편찬에 힘썼으며 전북대 교수,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셨다. 2005년 고향인 전북 장수군에 건재 정인승 선생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만 남다


□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학문적인 3대 업적은『우리 말본』, 『한글갈』, 『조선 민족 갱생의 도』라 일컬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조선 민족 갱생의 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겨레 사랑의 정신과 철학이 외솔의 국어학 연구에 사상적, 철학적 및 논리적 바탕이 되고 추진력이 되었기 때문에, 외솔의 국어학적인 업적이 방대하면서도 체계적이고 논리 정연한 것이 되었다. 먼저 스승인 주시경의 학문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이어 받아 국어 문법의 전반에 걸친 대 저서를 전통 문법이라는 하나의 이론적인 틀로 완성한 ‘우리 말본’이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에 관한 일체의 역사적 문제와 한글에 관한 일체의 이론적 문제를 망라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논하여 정연한 체계로 만든 한글갈이 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울산시 중구 동동에서 태어났는데 현재 그의 생가터가 울산시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일석 이희승 선생 생가는 의왕시에


□ 일석 이희승 선생은 18세 때 주시경 선생의 프린트로 된 교재 「국어문법」을 읽어 본 이후 국어학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경성제대 조선어급문학과(朝鮮語及文學科) 졸업 후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사전 편찬,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문제 등에 적극 관여하였고 저서로 『조선어학논고』(1947), 『국어학개설』(1955), 『국어대사전』간행(1961) 등이 있다. 일석 선생의 생가는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 남아 있다.


세 번의 감옥살이 끝에 애석하게 돌아가신 환산 이윤재 선생 


□ 환산 이윤재 선생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평북 영변 숭덕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일본 관헌에게 잡히어 평양 감옥에서 삼 년 동안 고초를 겪으셨다. 그 후 중국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삼 년 동안 역사를 연구한 뒤 「한글」지 편집 출판을 맡던 중 1937년 6월 7일 동우회와 흥사단 사건으로 검거 선풍이 일어나자 서대문 감옥에서 1년 동안 욕을 당하셨다. 세 번째로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도 홍원 경찰서에 갇히게 되어 악형과 고초를 겪다 1943년 12월 8일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 선생은 종교로는 예수교 장로였으며, 일생의 사업으로는 교육이요, 인격의 혁신과 정치적 혁명을 위하여서는 해외에서 흥사단에, 국내에 와서는 수양동우회에 관계하여 심력을 다하였고, 국어를 통하여 조선의 넋을 살리기 위하여서는 조선어학회의 중진이었다. 그의 글에는 「조선 글은 조선적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의 경과 기략」,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내용-표준어 발포식 석상에서 설명한 것-」「조선어사전 편찬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태진 기념관」이 파주에


□ 석인 정태진 선생은 힘든 옥고를 치루고 1945년 광복 후에 다시 고집스럽게 사전 편찬 일에 돌아와 1950년 6·25 전란까지 『큰사전』셋째 권을 펴내셨다. 전란 때 잠시 피난하였다가 1952년 5월 최현배 이사장의 결단에 따라 정태진 선생은 가족들을 피난지에 남겨 두고 류제한 선생과 함께 폐허가 된 서울로 들어왔다. 작업을 시작한 지 넉 달 반 만에 제4권의 교정을 끝마치고 10월 28일 지형을 뜨고 일단 마무리를 하였다. 나흘 뒤 고향 파주로 가는 길에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현재 선생의 고향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주공아파트 7단지와 금촌중앙도서관 옆에 「정태진 기념관」이 있다.


고루 이극로 선생은 잊혀진 한글학자


□ 이극로(1893~1978) 선생은 ‘잊혀진 한글학자’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1927년 독일 베를린대를 졸업한 후 귀국해 한글 운동에 앞장섰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말 큰사전 편찬 기금 모금을 담당하는 등 핵심적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948년 월북하여 학계에서 언급되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그의 조선어학회 시절 국어학자로서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 그의 생가가 파손된 채 남겨져서 생가 복원 모금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 국립국어원은 2010년부터 새로운 개방형 사전 편찬 작업을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국어원의 누리집을 방문하면 연결된 웹사전을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며 간단한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내 컴퓨터에 설치하거나 간단한 검색창을 원하는 누리집에 달 수도 있다.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해 보기 전에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지금의 편리함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 메인 화면

공공누리 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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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언어정보팀 김옥순 학예연구관(☎ 02-2669-9753)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