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1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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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와 바람

새천년 국어 문화 발전의 '집현전'이 되기를

민현식 / 제4대 어문규범연구부장 역임·서울대학교 교수

국립국어연구원이 어언 10주년을 맞는다. 사람의 나이 열 살로는 소년기이지만 1984년 국어연구소 창립부터 실질적 역사로 소급한다면 17주년이라 어엿한 청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문교부 어문과와 같은 행정 부서나 국어심의회와 같은 비상설 회의체에서 논의해 오던 우리의 어문정책이 1984년에 국어연구소의 설립으로 한 차원 높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어정책사(國語政策史)에서 큰 의의가 아닐 수 없었다.

본인은 1997년 3월 12일부터 1999년 3월 11일까지 만 2년간 이익섭 원장님을 모시고 어문규범연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바 있다. 당시 규범부는 연구원 6명이 있었는데 국어연구원 첫 핵심 국책 사업으로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을 수행하는 사전편찬실 업무도 관장하던 터라 이현우 실장(후에 조남호 연구원이 맡음.) 휘하 50여 명의 조사원, 편수원이 딸려 있던 거대 기구였다.
본인이 재직 중이던 2년간 규범부의 주요 현안으로는 『표준국어대사전』 편찬 사업이 가장 막중하였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사전 사업이 원고 집필을 거쳐 당시는 원고 교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사전 편찬 사업은 원래 사전 표제어들에 대한 뜻풀이, 문법 정보, 어휘 관련 정보 등의 다양한 정보를 조직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실어야 하는 고도의 기획과 집행 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교열 과정 중에 집필 지침이나 교열 지침의 변경이 불가피하게 요구될 때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 50만 표제어를 다 확인하고 고쳐야 하는 일이 생기므로 횡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1997년 당시는 사전 집필과 초기 교열 과정에서 제기된 맞춤법 규정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이 요구되는 시점이어서 이익섭 원장께서는 1997년 1월 7일 부임 이래 어문 규정 정비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2월부터 12월까지 30차례의 회의를 통하여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맞춤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국어심의회에 회부하였으나 1997년 말의 대통령 선거 정국에 맞물려 여론의 반발을 우려하여 보류되었다. 비록 개정안은 보류되었으나 이 위원회의 연구 성과는 앞으로 규범 연구의 이정표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아무튼 집필과 교열 지침의 집행 과정에서 빚어진 여러 문제점을 헤쳐 나가면서 표준국어대사전이 1999년 10월 첫 권을 선보이게 된 것은 연구원들과 편찬실장 이하 모든 편수원, 조사원, 객원 교열원들의 순수한 열정과 희생적 헌신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아쉬운 것은 사전 편찬 이후 지속적인 보완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외환 위기와 정부 구조 개혁 및 경제 논리의 잣대로 국어연구원도 존폐 논란이 이루어지면서 사전 편찬 사업이 후속 개정 사업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사전편찬실이 사전 편찬 후 해체된 점이었는데 이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사전편찬실은 재설치하여 사전 보완 사업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아울러 그동안 축적된 사전 편찬 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21세기 국어 문화가 최고의 사전 편찬 기술 위에 이룩되도록 국어연구원이 선도적 핵심 역할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세종의 한글 창제 정신을 계승하고 21세기 문화 전쟁 시대에 국어 문화를 선도하는 기본이 될 것이며,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학습자를 위한 국어사전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더욱 정제된 한국어 사전이 학습자 요구별로 다양하게 나오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사전 보완 작업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규범부의 두 번째 현안은 로마자 표기법 개정 작업이었다. 당시 1996년 말부터 진행해 오던 로마자 표기법 개정 작업이 1997년 5월의 공청회를 거치면서 연말에 개정안이 만들어졌으나 이것 역시 정치 논리 때문에 1997년 연말의 대통령 선거 정국과 맞물려 보류가 되었다. 그 후 1998년 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재론되면서 2000년 7월에야 새로운 개정안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는 로마자 표기법이 더 이상 개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보급, 실천되는 일만 남았다. 규범부의 세 번째 현안으로는 어문정책에서 가장 민감한 사항이었던 한자 문제로 문자 논쟁이 재연된 것이었다. 당시 한자 교육 강화는 대통령 공약 사항으로 이것의 실천이 거론되면서 한글 전용론과 국한 혼용론의 논쟁이 1998년 말부터 재론되어 국어심의회 한자 분과 위원회도 열렸는데 공문서나 관광지 안내판에는 국한 병용 표기를 한다는 결론으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 한글 전용버이나 공문서 사무 관리 규정들에서도 가능한 것이라 큰 의미는 없는 결론이었다.

본인은 지금도 이 두 논쟁이 소모적 논쟁을 접고 발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논리가 있다고 믿는다. 한글 전용 문화는 대중적 실용 속에 점차 대세로 발전할지라도 학교 교육의 테두리 안에서는 초등학교부터 기초 한자 교육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특히 학문 영역 안에서는 1900년대의 학문의 문체가 국한 혼용체가 주류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한자 이해 능력이 당연히 조기 교육으로 배양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국한 혼용체로 된 학문의 연구물을 못 읽고 무지하게 된다면 우리 학문과 국가 경쟁력의 퇴보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비록 국한 혼용체를 쓰지는 못할지라도 읽을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자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늘날 국어 교육에서도 한자 교육이 퇴출되고 국어 교사들조차 한자 지도 능력을 상실해 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동양 한자권 문화를 주도적으로 제어(制御)하고 전통 한자 문화의 급작스러운 단절을 막기 위해서는 한자 교육이 꼭 필요하며 그 시기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제 새천년을 맞아 국립국어연구원은 김포공항 옆 방화동 청사 시대를 맞으면서 국어 문화를 선도하는 보금자리이면서 다가오는 문화 전쟁, 언어 전쟁 시대에 한국어의 세계화를 이룩할 전진 기지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시점에 있다.

첫째는 어문정책과 집행의 중추적 기구로서 학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국어학 이론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즉 주요 연구 사업을 통하여 세계의 언어 연구의 동향을 파악하고 국어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선도하여야 한다. 이는 국어연구원이 어문정책 연구와 실용적 사업에만 몰두하다 보면 국어 이론 연구와 개발에 소홀하여 방향 감각을 상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용 연구일수록 이론 연구에 대한 투자와 관심을 연구원 개개인은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현대 언어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연구원들 스스로 활발한 논문 발표를 통하여 자기 발전을 도모하여야 함은 물론 이들의 능력 함양을 위하여 해외 파견 연수 등의 지원, 각종 학술대회 참가 지원 등이 있어야 한다. 연구원의 연구 사업이 1인 1년 단위라 깊이 있는 연구에 어려움을 주므로 2, 3, 5년 단위의 중장기 연구와 팀별 연구도 필요하며 연구원 증원도 필요하다. 또한 연구 과제의 중간 및 최종 공개 발표를 의무화하여 연구 방향의 오류나 연구원 단독의 주관적 오류를 예방하고 객관적 우수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규범부와 실태부를 중심으로 규범 계몽 연구와 국어 사용 실태에 대한 실용적 연구들을 다양하게 수행하며 국민에게 널리 알려 21세기 언어 전쟁 시대에 국어 수호의 파수꾼의 역할을 다하고 한국어의 세계화를 바라보며 국어 문화를 선도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① 국어 표준화 사업, ② 국어 세계화 사업, ③ 국어 실용화 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
우선 ① 국어 표준화 사업을 위해서는 『표준국어대사전』의 증보 사업과 사전 뜻풀이의 정밀화를 통한 표준어 사정 작업을 지속하고 이를 토대로 한 표준 문법을 확립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누구나 홈페이지로 사전 용례, 뜻풀이 등에 대한 비판과 제안을 하도록 하고, 뜻풀이에 대한 전문 지식 정보를 전자우편으로 받아 연구원에서 사정(査定), 수정하는 체제가 필요하다. 국어연구원에서 이미 각종 어문 생활 관련 민원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답변하고 있듯이 표준어 사정에서도 문제 어휘를 일일이 국어심의회를 거치지 않도록 자체 사정하는 기능을 두어야 한다.
② 국어 세계화 사업을 위해서는 일본 국어연구소가 국제 일본어 교육의 중심 구실을 하듯 국어연구원도 국제 한국어 교육 연구기관으로 위상을 재정립하여야 한다. 한국어 능력 시험 제도를 주관하고 언어권별 교보재와 교수법 개발, 언어유형론적 국어 연구, 국어와 각 언어별 대조 언어학적 연구 등도 해야 한다.
③ 국어 실용화 사업으로는 언어 심리학(내·외국민의 한국어 의식 조사, 언어 습득과 발달 등), 사회 언어학(위상어, 성별어, 계층어, 세대어, 지역어 실태 조사 등), 응용 언어학에 근거한 다양한 연구 사업을 개발하여야 한다. 또한 각종 교과서 편찬 시 어문 교열 단계를 도입하고 교열 심사를 강화하도록 하며 국어, 작문, 독서, 화법 이론 및 지도서 개발도 할 수 있도록 국어 교육학 연구 사업을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어 교육학, 국어 정보학, 계량 언어학, 사회 언어학, 심리 언어학 등과 같은 실증적 응용 국어학의 이론과 방법론들을 수용, 개발하고 우리 국어 연구에 응용함으로써 실생활에 유용한 성과들을 많이 내어 학계와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이는 일본의 국립국어연구소가 실증적 연구로 일본 국어학계에 큰 기여를 하는 것도 참고할 일이다.

셋째는 자료부의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의 각종 국어 연구 자료를 집적함으로써 국어 중앙 도서관과 국어사 박물관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어연구원의 도서실 기능을 대폭 확충하여 국어 관련 사료와 자료의 체계적 보존에 힘쓰며, 국어연구원에 국어사 박물관도 만들고 복도를 이용한 상설 자료 전시도 하여 학자들은 물론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국민 누구에게나 개방하여 국민 속에 사랑 받는 국어연구원이 되어야 한다. 참고로 1948년에 설립한 일본 국어연구소의 도서실은 연구소 건물의 2개 층을 차지하는 방대한 규모로 일본어 연구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각종 연구 성과의 체계적 보급을 위해서는 정부 부서와의 유기적 협조부터 이루고(가령 로마자 표기법을 외무부 여권 발급 업무에서부터 지키도록 하거나) 공무원들과 교사의 어문 사용 능력 향상에 힘쓰는 연수 사업을 꾸준히 지속하여야 한다. 또한 각종 연구물의 출판과 판매 기능도 강화하여 연구물도 일련번호를 붙여 <국어연구원 연구 총서>로 유료로 판매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는 덕수궁 뜨락을 밟으며 국어연구원에서 보냈던 시기가 보람있는 시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류 결재에만 바빠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쪼록 국어연구원이 새천년 한민족 도약기에 국어 문화를 선도하고 국어 연구를 세계적으로 도약시킬 21세기의 집현전이 되기를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