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창 석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3. 맺음말
   지금까지 한글의 제자 원리와 글자꼴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독특한 문자이고, 한글의 그런 특성들은 독특한 제자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여기서의 논의 초점도 한글의 특성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독특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기술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독특한 시각과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글의 경우에는 아주 독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이론과 용어들로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한글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기술하기가 쉽지 않다. 한글이 본래 과학성을 지닌 문자라면, 그에 대한 기술과 운용도 그 과학성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한글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한글의 자모 순서 문제를 통해 그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강조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현대의 ‘한글 맞춤법’에 규정되어 있는 자모 순서는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순서 즉 ‘훈민정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컨대, 초성의 경우, 현재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의 순이지만, ‘훈민정음’에서는 ‘ㄱ ㅋ ?ㄷ ㅌ ㄴ?????? ’ 의 순서로 되어 있다. ‘훈민정음’에서의 자모 순서는 당시의 이론에 근거해서 정해진 것이다. 당시에는 초성을 조음 위치(아/설/순/치/후)와 조음 방법(전청/차청/불청불탁)으로 분류하였으므로, 그런 기준에 의해 순서도 결정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모 순서가 이론적이라는 점이다. 이론적인 자모 순서를 익히는 것은 단순히 순서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내재된 이론을 함께 익히는 것이다. 또 이론적인 것은 논리를 지니므로 가르치고 배우기가 쉽다.

  현대의 자모 순서는 특정 이론에 근거해서 정해진 것이 아니다. “훈몽자회’부터 나타나서 조금씩 변해 온 전통적인 순서를 그냥 따른 것이다. 문제는 표기 원리는 전통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바꾸면서,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모 순서는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 즉 맞춤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자모 순서가 표기법과 관련하여 이론적 근거를 지니던 것이었는데, 맞춤법이 바뀜으로 해서 그 이론적 근거와 논리를 잃게 된 것이다.

   ‘훈몽자회’에서는 한글 자모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쓰는 여덟 자와 초성에만 쓰는 여덟 자 그리고 중성을 구분한 것이다. 그와 같은 분류는 종성에는 여덟 자만 써도 되는 당시의 표기법을 고려할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부류의 내부 순서에서도 일정한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ㄱㄴㄷㄹㅁㅂ?????? ’과 같은 초성의 순서는 조음위치와 제자 순서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훈몽자회’의 자모 순서 역시 지극히 이론적인 것이며, 그와 같은 순서를 익히면 제자 순서 및 표기법 그리고 당시의 음 이론 등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여러 가지 효과가 있다.

   현대 맞춤법에서는 종성에 여덟 자만이 아니라 모든 초성자를 쓸 수 있다. 따라서 ‘훈몽자회’처럼 초성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순서를 정하는 것은 이제 이론적인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다. 현대의 자모 순서는 ‘훈몽자회’의 그것과도 조금 다른 것이다. ‘훈몽자회’에서는 ‘ㅋ ㅌ ㅍ ㅈ (? ㅇ) ㅊ ㅎ’의 순이었는데 지금은 ‘ㅈ ㅊ ㅋ ㅌ ㅍ ㅎ’으로 바뀌어 있다. 이제는 ‘아-설-순-치-후’라는 순서도 깨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자모 순서는 초심자나 전문가나 할 것 없이 모두 기억하기가 힘들다.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서 논리적으로 터득할 수 없고 무조건 외워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들여 그 순서를 외워 봐야 그것은 순서 암기 이상의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글의 특성을 간과하고 무시한 데서 야기된 결과이다. 한글은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만들어진 문자로서, 글자꼴 하나하나에 이론적인 정보가 담겨져 있는데, 현재의 자모 순서는 그것을 거의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ㄴ ㄷ ㄸ ㅌ 등의 문자가 나타내는 소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발음 위치가 모두 같다는 점이다. 한글은 그와 같은 내용을 미리 확인하고 그것을 반영하여 만든 문자이므로, 글자꼴에 그 점이 이미 나타나 있다. 따라서 자모 순서를 정할 때 이들 문자들을 나란히 배열하게 되면, 자형을 익히기도 쉽고, 일석 삼조의 부수적인 효과도 있을 수 있다. 한글의 제자 원리도 익히고, 음 이론도 저절로 배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글의 진면목은 제자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맞게 한글을 운용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한글의 제자 원리는 문자를 만든 원리로서 이미 생명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한글이 사용되는 한, 그 운용의 기본 원리로서 계속 생명과 가치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제자 원리이다. 따라서 완전하고 올바른 이해를 위한 연구와 노력도 언제까지나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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