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창 석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3. 한글의 글자꼴
   문자는 시각적인 부호이다. 즉 각 문자가 고유한 꼴을 지님으로써 상호 변별되고, 그 변별을 통해 언어 수단으로서의 기능도 유지된다. 그러므로 말소리에 대한 연구가 모든 언어에서 가능하고 필요하듯이, 글자꼴에 대한 논의도 어떤 문자의 경우에나 가능하고 또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글자꼴에 대해 논의될 수 있는 내용은 문자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각 문자의 성격과 기원 등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은 글자꼴이 다른 문자들과는 전혀 다른 과정으로 결정된 문자이다. 따라서 제자 원리가 유별난 만큼, 글자꼴에 관한 논의 주제와 내용 역시 유별날 수밖에 없다.

  글자꼴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글자꼴이 생겨난 유래나 역사(각 글자꼴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변해 왔는가)도 논의될 수 있고, 글자꼴이 지닌 형태상의 특징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글의 글자꼴들이 어떻게 정해졌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 말한 셈이다. 제자 원리가 곧 글자꼴의 유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번째 내용 즉 글자꼴의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물론, 이 부분도 제자 원리와 전혀 무관한 내용은 아니다.

   한글(자모)의 글자꼴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각각의 글자꼴이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고, 둘째는 각각의 글자꼴이 독립된 것이면서도 실제 표기에서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글자꼴이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독특한 제자 원리 때문이다. 글자의 모양을 정할 때 소리의 특징(자질)을 연구하여 그것을 글자꼴에 반영했기 때문에, 글자꼴이 여러 가지 정보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사람의 이름을 정할 때도 그냥 짓는 경우와 돌림자를 넣어 짓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두 가지 이름은 그것이 나타내는 정보와 기능면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기능은 단순히 한 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 주는 것 뿐이지만, 후자는 그 외에 다른 정보(돌림자에 입력되어 있는)도 나타내 준다. 한글의 글자꼴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글의 글자꼴에는 음운론적인 정보와 철학적인 정보 등이 본래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각 글자들이 나타내는 소리의 단위는 로마자와 같이 음소이지만, 로마자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두 번째 특징 즉 각각의 글자들이 고유의 꼴을 지니면서도 그것이 실제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단위의 한 요소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아쓰기라고 하는 표기 원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모아쓰기라는 표기 원리는 글자꼴이 결정되고 난 후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아쓰는 것을 전제로 하여 각각의 글자꼴들이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모아쓰기라는 표기 원리는 각 글자꼴의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한글을 풀어쓴다고 가정해 보면 자명해진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한글의 풀어쓰기를 주장한 바 있는데19) 그런 주장의 내용 중에는 글자꼴의 수정도 대개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들이 곧 현재의 글자꼴이 모아쓰기를 전제로 해서 나온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초성과 중성의 글자꼴이 처음부터 분명하게 구분되어 만들어진 것도 그것을 합쳐서 쓸 것임을 미리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로마자의 경우처럼 표기하는 경우에는 자음과 모음이 형태상으로 특별히 구별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개개인이 독립적인 존재이면서도 가족 등의 집단을 구성할 경우에는 집단의 한 구성원 즉 부분이 되기도 한다. 가장이나 주부 그리고 자식 등의 신분은 개체로서보다는 집단의 구성 요소로서의 신분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초성이나 중성 등도 독립된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한 요소(부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초성을 적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 역시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 결국 한글의 글자꼴에 관한 논의는 문자(자모) 차원의 논의만으로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 같은 초성자라 하더라도 초성에 쓰일 때와 종성에 쓰일 때 서로 모양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글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한글의 글자꼴에 관해서는 논의될 수 있고 또 반드시 논의되어야 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절차와 순서가 있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한글의 경우에는 문자와 그것이 합쳐진 또 하나의 표기 단위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용어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어야만, 다른 특성들도 분명하게 논의되고 기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 풀어쓰기라는 용어도 최선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상태(모아쓰기)를 기준으로 볼 때는 그것을 다시 푸는 것이지만, 본래는 ‘안 모아’ 쓰는 것이지 무엇을 ‘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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