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창 석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물론, 음에 대한 분석과 이론만이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글자꼴을 정하는 과정에서 적용된 상형과 가획 등의 원리도 똑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독창성과 과학성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궁금해했고, 우리도 그 점을 구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인 제자 원리 특히 현대 이론에 못지 않은 15세기의 음 분석이나 이론과 관련하여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중국의 성운학이었다. 당시에 참고할 수 있었던 이론이 성운학뿐이라고 생각했고, ‘훈민정음’에서도 성운학의 용어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한자음 이론인 성운학을 도입하여 그것을 독자적으로 개량, 발전시킨 것이 곧 훈민정음 이론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고,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아예 다른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13) 그러한 생각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해 볼 수 있는 상식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문자가 기존 문자에서 나왔다는 상식이 유독 한글에는 맞지 않듯이, 당연해 보이는 것도 특별한 경우에는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럴듯한 것일수록 더더욱 면밀한 확인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제자 원리와 관련한 그 동안의 논의들에서 성운학이나 성리학의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오르내리다 보니, 한글의 제자 원리도 본래 상당히 추상적이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어 온 감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제자 원리는 어렵거나 추상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소리의 특징을 문자에 그대로 반영한다는 기본적인 발상과 상형과 가획 등의 구체적인 원리들은, 절묘한 것이기는 하지만, 고차원의 이론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즉 전문적이고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상식만으로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발상들인 것이다. 따라서 제자 원리에 대한 분석도 일단은 쉽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쉽게 생각하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면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외국의 학술 이론을 제대로 익히고 이해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현대 학자들에게 구미 이론의 습득이 어렵게 느껴지듯이, 15세기에도 중국의 성운학을 제대로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래 이론을 수용하여 그것을 독자적으로 개량, 발전시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성운학을 수용, 개량하여 음(절)의 삼분법과 같은 이론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15세기에는 해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문제는 그 사실 여부의 증명 즉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냈는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음의 삼분법이 나오게 된 바탕을 성운학의 반절법 쪽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를 너무 어렵게 만드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쉬운 문제도 어렵게 접근하면 한없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고, 특히 전제가 잘못되면 답이 아예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답이 잘 안 나오거나 어렵게만 느껴지는 문제의 경우에는 시각을 바꾸어 보거나 전제의 타당성 여부를 먼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제자 원리의 핵심인 음의 삼분법 이론이 어디서, 어떻게 해서 나왔나 하는 문제의 경우에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삼분법 등의 음 이론과 관련하여, 그런 이론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따져 보기 이전에 더 근본적인 의문 하나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새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왜 음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당장은 답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후자는 답이 뻔한 것이다. 즉 음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제자에 적용한 것은, 소리를 적는 문자(표음 문자)를 만들려고 했고, 소리의 특징을 문자(글자꼴)에 반영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두 가지 결론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새 문자를 표음문자로 하고 거기에 소리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을 반영한다고 하는 생각(발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고도의 이론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며, 오히려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러한 생각이 아무에게서나 저절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국어 표기를 위해서는 표음문자가 필요(적합)하다고 하는 결론은 고차원의 이론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결론들은 경험자 쪽에서 접근하면 상식적인 내용에 불과한 것이지만, 비경험자들 쪽에서 어렵게 접근하면 좀체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될 수도 있다.
13) 지금도 그런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훈민정음 관련 논저에서 그런 식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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