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창 석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 관련 용어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을 꼽는다면 역시 ‘문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字)’와 ‘글자’라는 단어도 ‘문자’와 거의 같은 뜻으로 현재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함께 후보가 될 수 있다. ‘제자 원리’와 ‘글자꼴’에도 이 용어들이 포함되어 있듯이, 지금으로서는 이 용어들을 쓰지 않고서 문자에 관해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사람’이나 ‘남자’ ‘여자’ 등의 단어를 쓰지 않고서는 사람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문제는 ‘문자’ 등의 기본 용어들이 한글의 특성을 제대로 고려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용어로는 한글의 특성을 제대로 기술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용어부터 그렇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한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그 이후는 보나마나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자’ 등의 용어는 한글에도 사용되고 다른 문자들을 대상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다른 문자에 사용할 때에는 용어의 의미가 비교적 명확한데, 한글에 사용하면 의미가 애매해진다. 한글 외의 다른 문자들은 문자가 곧 표기의 단위이다. 문자를 가로나 세로로 그냥 나열하여 단어와 문장을 표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자와 구별되(어야 하)는 다른 표기 단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문자’의 개념에 혼동의 소지가 애당초 없고, 그래서 그것을 ‘글자’나 ‘자’로 바꾸어 말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로마자를 뭐라고 하든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어차피 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들이 하나인 집에서는 그 아들을 부를 때, 이름을 불러도 되고, 그냥 ‘아들’이나 ‘애’ 해도 괜찮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로마자와 한자, 가나 등의 경우에는 그러하지만, 한글은 사정이 다르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기는 싫지만, 여기서 한글의 독특함을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은, 모두가 잘 알듯이, 문자 단위(ㄱㄴㄷ 등의 자모)를 그냥 배열하지 않고 그것을 일정한 원칙에 의해 서로 결합하여 단어와 문장을 표기하고 있다. 예컨대, ‘ㄱㅏㅇㅅㅏㄴ’이라고 적지 않고 ‘강산’으로 쓰는 것이다. 창제 당시부터 변하지 않은 그러한 원리 때문에, 한글의 경우에는 문자 단위와는 다른 별개의 표기 단위가 존재하게 된다.

  한글의 두 단위는, 음운론에서 음소와 음절이 구분되듯이, 엄격하게 구분될 수 있고 또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된 까닭인지 아직까지도 그 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두 단위의 존재와 차이를 모르는 것은 분명 아닐 터인데도, 그것을 구분하는 용어도 없고, 애써 구분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 여럿인데도 각각의 이름을 짓지 않고 모두를 그냥 ‘아들’이나 ‘애’로 부르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따라서 혼동이 생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ㄱ. 한글은 현재 스물넉 자이지만 본래는 스물여덟 자였다.
ㄴ. ‘허준’과 같이 한 글자로 된 이름을 외자 이름이라고 한다.
ㄷ. 소리 글자를 다른 말로 표음 문자라고 하기도 한다.
ㄹ. 빈 자리에 넉 자로 된 단어를 찾아 쓰라.



  ㄱ, ㄴ, ㄷ의 예에서 보듯이, ‘자’와 ‘글자’ 그리고 ‘문자’라는 용어는 서로 구분없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문자(자모)를 뜻하기도 하고 그것이 합쳐진 다른 단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ㄹ과 같은 문장은 그 의미가 애매하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문자에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들을 한글에도 그대로 쓰기 때문에 빚어진다. 즉 한글의 독특함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특성에 맞는 대접이나 조치를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음소와 음절의 구분조차 제대로 안 된 음 이론이 가치를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글 이론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두 단위를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한글론의 기본이고,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기는 부담이 현실적으로 엄청난 것인데,5) 지금까지 왜 그 문제를 방치하고, 그 부담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6)
5) 이 글을 쓰는 데도 그 점이 제일 어렵다. 용어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에서 임의로 용어를 만들어 쓰면 그것도 혼란을 부를 수 있다. 필요한 용어가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부정확한 용어들을 제각기 남발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은 결코 아닐 것이다.
6) 컴퓨터로 한글을 구현하는 과정에서도 이른바 완성형과 조합형의 문제가 발생하여 지금까지도 논쟁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문제들도 한글의 특성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므로, 한글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시각을 갖추어야만 해결책도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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