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창 석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자 원리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조차도 거의 잊혀진 채로 오랫동안 내려왔다. 그래서 금세기 초반까지도 한글 역시 기존의 다른 문자에서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글의 기원이라는 제목 아래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설들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3)

   지금도 유사한 견해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한글의 경우에도 창제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제자 원리라는 논제도 성립되지 않는다. 즉 제자 원리를 논하는 것은 과학적인 창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 글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현재로서는 창제 사실을 의심하거나 뒤집을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글자꼴을 비롯한 한글의 제 특성은 독특한 제자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 원리가 제대로 구명되어야만 한글의 제 특성이 제대로 파악되고 기술될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한글의 특성으로 ‘독창성’과 ‘과학성’을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제자 원리’의 내용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 원리와 관련한 모든 궁금점이 다 풀린 것은 아니며, 이미 파악된 내용조차도 제대로 기술되고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무엇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제대로 정리, 기술하는 것은 약간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의 특성은 그것을 표현(설명)해 주는 수단(용어와 이론)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글의 제 특성도 그에 걸맞은 이론과 용어가 갖춰지지 않으면 그것이 제대로 설명되거나 기술될 수 없다. 한 가지 예로, 우리는 한글이 로마자처럼 음소 단위를 적는 문자이지만, 로마자와는 다른 점도 있음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질 문자라는 표현 수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것을 제대로 말하거나 기술하지 못했다. 즉 로마자와의 차이를 알면서도 기존의 용어인 음소 문자로만 한글을 기술해 왔던 것이다.4)

  이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어도 결과적으로는 한글의 특성을 왜곡하거나 무시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런 부분들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한글의 독특함을 지적하고 강조하는 논의는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 독특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별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글만의 특성도 일반 문자론의 경우와 같은 시각과 이론으로 다루어, 결과적으로 특성을 특성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제자 원리’와 ‘글자꼴’의 경우도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제자 원리’야말로 한글의 특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에 관한 논의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은 그 특성에 걸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3) 최현배(1961) 등에서 그때까지 나왔던 여러 가지 기원설들에 대한 정리와 비평을 볼 수 있다.
4) 다른 글에서도 많이 지적되었듯이, 한글이 일반적인 의미의 음소 문자와는 다르다(소리의 자질까지 나타낸다)고 하는 점을 명시적으로 처음 지적한 사람은 국내 학자가 아니라 외국의 학자였다(Sampson 1985). 국내 학자들이 그보다 한글에 대해 더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아는 것도 정확하게 기술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