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민 (국립 국어 연구원장)
2. 단어의 뜻과 힘을 살릴 수 있도록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덕목을 강조해 왔다. 삼강 오륜(三綱五倫)에 바탕을 둔 ‘충성’, ‘효도’, ‘우애’와 같은 단어는 지난 시절 지배 계층의 통치 논리로서 오늘날 그 실천 방법까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 내용을 새로운 사회와 시대에 맞도록 손질해서 실천한다면 모두가 만고 불변의 덕목으로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이들 단어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기만 한다면 ‘사랑’, ‘성실성’, ‘끈기’, ‘참을성’, ‘용서’, ‘양보’, ‘희생’, ‘봉사’와 같은 온갖 덕목을 함께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서양식 가치나 기능을 지나치게 받든 나머지 전통적 미덕의 가치를 많이 잃고 말았다. ‘효도’와 ‘우애’의 내면적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부모 형제를 가볍게 여기다가 가정과 사회의 질서가 무너졌으며, ‘자유’의 진정한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다가 책임과 의무를 거들떠보지 않는 방종으로 흘렀고, ‘평등’의 고귀한 뜻을 살려 쓰지 못하는 바람에 모두가 천민으로 평준화하는 불행에 휩쓸리고 있다.
서양식 덕목이라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제대로 실천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가령, 평등의 뜻을 실천하면서 누구나가 ‘교양’, ‘품위’, ‘예절’, ‘질서’, ‘양보’, ‘용기’와 같은 미덕을 발휘한다면 모든 국민의 의식 수준은 상향 평준화 쪽으로 발전하겠지만, 반대로 나간다면 그 결과는 하향 평준화 쪽으로 뒷걸음치고 만다. 그러한 국가사회는 자연히 천박한 사고 방식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품위 있는 단어의 뜻이 천박하게 쓰이고 있는 사례를 한 가지만 구체적으로 들어 보겠다. ‘훌륭하다’는 추상어의 뜻은 기본적으로 고귀한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이 때의 ‘훌륭한 사람’의 뜻을 한마디로 이르자면 ‘인격을 지닌 사람’이 될 것이다. 학문과 도덕과 예술을 두루 갖추고 그 덕성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만 인격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인격은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이른바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나 석가나 공자와 같은 성인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 인격이다. 그러한 인격자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학자, 위대한 종교가, 유명한 예술가가 많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뛰어나고 위대하고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무조건 인격을 갖춘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흔히 훌륭하다는 말을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로 착각하고 ‘뛰어나다’, ‘위대하다’, ‘유명하다’는 뜻과 혼동하고 있다. 대통령, 국회 의원, 대학 교수는 상당히 뛰어나고 위대하고 유명하기는 하나 그들을 한결같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평교사로 정년을 맞은 어느 초등 학교 교원이 기자에게 자랑스럽게 밝힌 이야기 한 도막이 떠오른다. 자신은 비록 평교사지만 제자 중에는 국회 의원, 판검사, 대학 교수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지위나 권력을 얻은 제자를 무심히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한 듯하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는 ‘훌륭하다’는 말의 뜻이 ‘뛰어나다’, ‘위대하다’, ‘유명하다’는 뜻과 구별되지 않고 쓰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잠시 생겼다 없어지고 마는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를 지나치게 높이 받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훌륭한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인격이다. 인격은 평생을 두고 노력한다 해서 쉽게 얻을 수도 없으며, 한번 얻은 인격은 영원히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인격은 훌륭한 것이다. 성인들이 역사에 길이 길이 남아 세상을 밝혀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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